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땡땡 Aug 09. 2020

'어제보다 나은 나'는 없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순간, 살 이유가 없어진다.


난 생각이 많다. 가만 보면 생각은 아침에 눈떠서 잠들기 전까지 온종일 흘러다. 양옆으로 고개를 저으며 거추장스럽게 달라붙는 것을 떨쳐내려 하지만 어떤 때는 무의식을 지배해 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꿈에서 깬 새벽이면 내가 억압하려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되려 정확히 알게 된다. 보통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즉 걱정, 그리움, 후회가 많은데 근래 가장 주축이 된 건 '나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거창하게 말하면 삶의 의미 정도.


나름 철학적이고 진지한 고민이 어떤 때는 시냇물처럼 졸졸, 어떤 때에는 폭풍우처럼 거세게 몰아친다. 가라앉았던 흙탕물이 떠오르듯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보통은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벗어나려 애쓰곤 하는데 어쩌다 급류에 휩쓸리는 날엔 결국 그 끝에 다다르고 만다.



거기서 본 것은,
더는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부단히, 다음 날을 살아갈 이유를 알기 위해, 어제보다 나은 점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듯 찾아내려 했지만 결국 손으로 쥐어 올린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잠깐의 안도감 정도.



눈뜨면 전날보다 하루 더 늙은 채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자동으로 숨이 쉬어지고 같은 일상을 산다. 샤워하는 일,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일, 분리수거하는 일, 쓰레기 버리는 일, 눈을 감고 침대에서 휴식하는 일과 같이 살기 위한 필수적인 행위들이 가치 없이 느껴진다. 내가 내 뒤치다꺼리를 하는 기분. 가치 있는,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런 기분을 감당하기 힘들어 엄마에게 터놓은 적 있다.



왜 사는 건지 모르겠어. 재미도 없고.
딱히 불행하진 않은데, 살 이유를 모르겠어. 다들 그런 걸까?



그녀에게 물은 까닭은, 나보다 더 그런 감정을 느낄 것 같다는 알량한 우위 의식에서였다. 팔에 생긴 화상 자국이 보여주듯 엄마는 충분히 고단한 인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돌아온 대답은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였다. 그냥 살아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언니와 나로 인해 인생의 무료함 속에서도 행복을 찾는다고. 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새 인생을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그럼 좀 재미가 있다나.


그녀의 말에 반쯤은 공감하면서 반쯤은 부정하기도 했다. 실로 사람들은 자식을 분신처럼 여기기도 하고 그들의 감정을 자신의 감정인양 착각하기도 한다. 새로운 생명을 통해 지나온 길을 다시 겪는 자메뷔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설레고, 두근거리고, 낯설고, 어려운.


하지만, 자식을 낳지 않는다면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이 기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나이가 지긋한 비혼 주의자나 딩크족에게 물어야 알 수 있는 걸까.




삶의 의미, 존재 이유를 찾으려다보면 나는 살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 어제보다 나은 것 중에 내 마음을 채워줄 만한 것은 없다. 인생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사건이 아니라면, 지금 현실적 수준에서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내가 다음 날을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진 못할 것 같다. 내게 있어 어제보다 나은 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간 24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무엇과도 등가교환 될 수 없는 가치가 생긴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만 현재에서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에서 현재를 본다면 오늘 역시 내일에겐 환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하루가 되지 않을까.



'오늘은 인생에 다시없는 소중한 날이에요.'

'오늘은 어제 죽었던 누군가 그렇게 그리던 내일이에요.'


이런 고무적인 얘기를 뱉고자 하는 건 아니다. 오늘 하루, 이 순간의 중요성이 스스로에게도 크게 와닿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더 이상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더 나은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느라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있다고 느낀 순간부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왜 계속 걸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렇다고 땅 밑으로 꺼질 마음과 용기는 없었다. 그러면 엄마말처럼 그냥 남들처럼 살면 되는 일이었다. 종일 침대에 누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커뮤니티 유머 게시판을 보는데 하루를 다 쓰며, 일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숨 쉬는 그대로 존재하면 되었다.



때때로 이 마음이 옅어질지 모른다. 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들 사이 혼자 멈춰서 있을 때면 무력함과 조급함이 몰려올 수도 있다. 그럴 땐 가만히, 사고의 급류를 타본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닌가.


내가 과거보다 낫기 때문에 현재를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대상 없는 그리움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