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좀 꼭 쓰고 가줘요.'
전날 당직 선생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셨다. 그가 가리키는 종이를 몇 장 넘겨보니 모두 '이상 무'라고 쓰여있었다. 까먹지만 않으면 적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떠나는 그의 자리에 짐을 풀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작년 말부터 어쩔 수 없이 일을 쉬게 되면서, 요양병원에서 하루씩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주 업무는 사망선고인데 다행히 지금까지 한 번도 할 일이 없었다. 무거운 직책에 처음엔 다소 긴장되기도 했지만, 별일 없는 밤이 반복되자 점차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역시, 새벽부터 꽤 멀리 떨어진 바닷가까지 대중교통을 타고 오느라 쌓인 피로를 숙면으로 풀고 싶다는 바람뿐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 누웠다. 늘 그랬듯 아무 일도 없겠지. 일지 쓰는 거 까먹을 것 같은데 그냥 미리 써둘까. 별 시답지 않은 고민을 하다 잠들었는데 혼자 쓰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205호에 xxx님 사망하신 거 같아요. 와서 봐주세요."
그랬다. 한밤중에 나를 찾을 일은 하나였다. 한창 깊은 새벽이라 비몽사몽 할 법도 했지만, 은연중에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다만 인턴시절 환자분을 모시고 응급실에 간 적은 여럿 있었지만, 실제 익스파이어한 상태를 마주한 경험은 없었기에 진료복으로 갈아입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자리에 서서 사망선고 매뉴얼을 다시 한번 상기했고 이내 병실로 올라갔다.
유일하게 불 켜진 다인 병실엔 잠든 거라고 해도 무방해 보이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저런 표정은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분들 중 절반이상이 의식이 희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온한 얼굴이 나로 하여금 방금 전해 들은 말에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청진기 좀 주시겠어요?"
너무나 앙상하게 마른 몸. 떨리는 마음으로 건네받은 것을 가슴에 댔다. 그러나 나의 그것처럼 뛰어야 할 박동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펄스옥시미터는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어떤 숫자도 읽어내지 못했고, 직접 경동맥과 요골동맥을 짚었지만 역시 느껴지는 게 없었다. 이내 감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펜라이트로 강한 빛을 비췄으나 초점 없는 동공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끝으로 확인한 심전도는 실제로 본적 없이 flat 했다. 사망이었다.
"보호자가 오는 중이니 오시면 그때 사망선고 해주세요. 연락드릴게요."
다시 1층 당직실에서 대기했지만, 가만있기 어려웠다. 콜이 오기도 전에 병실로 올라가려는데 병원 로비에 막 도착한 보호자 한분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그는 가운을 입은 나를 따라왔고,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전할 위로의 말을 찾기도 전에 병실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아니 어쩌면 보호자분을 위해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는 몸에 청진기를 가져다 댔다. 아드님께서 어머님을 붙잡고 막 흔드시는 덕에 제대로 들을 수 없었지만 말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엄마 눈 좀 떠봐... 몸이 아직 따뜻한데 사망이라뇨..."
아흔이 넘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은 채, 환갑은 족히 돼 보이는 아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힘없이 외쳤다. 그러나 이 상황이 익숙한 간호사 선생님께선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들춰 발아래에 놓인 전기찜질기를 보여주었다. 박동이 멈추고 진즉 식어가던 육체. 이젠 사망선고를 해야 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2023년 1월 29일 새벽 1시 17분 xxx님 사망하셨습니다."
내 말 한마디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여전히 고인의 얼굴을 쓰다듬는 유족의 모습과 통보하듯 내뱉어진 그 말이 기름에 물 한 방울 떨어진 듯 섞이지 못하고 맴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사자라도 된듯한 느낌에 곧바로 목례를 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잠시 할 일이 남아있어 근처에 서있는데 정적 속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미안해."
60년 넘게 부모로 살아준 고인에게 가장 전하고픈 말이 아녔을까. 그분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순 없겠지만, 나 역시 같은 일을 당한다면 모든 마음이 응축되어 나온 한 마디가 '미안해' 일 것 같았다. 엄마는 날 지켜주기만 하다 간 것 같아. 난 평생 엄마에게 어린 시절 모습으로 존재했을 테니까. 오늘 처음 본 그녀의 얼굴에서 한 세기 가까운 삶이 그려지는 것 같은 건 왜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다면, 나는 이곳이라 생각한다. 인적이 드문 고요한 겨울바다, 그와 주파수를 맞춘 듯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은 병동, 오늘따라 늦게까지 불 켜진 당직실. 생명력이 고장 난 전구처럼 깜빡이는 공간.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모든 게 밝아오자 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늘따라 유달리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