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뉴스가 연예계 마약 투약으로 도배됐었다. 공교롭게도 그에 연루된 배우와 가수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이들이라 마음이 착잡했었다. 심지어 아주 오랜 기간 좋아해서 주변 모두 내가 그들의 팬임을 알고서 연락을 해왔다. 심지어 엄마도 네가 좋아하는 그 배우가 그렇게 돼서 어쩌니 했고, 친구 하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혹시 마약 감별사야? 지금 또 누구한테 빠져 있는지 말해줘, 다음 누군지 미리 알게.”
나는 마약 탐지견이라고 농담 삼아 웃었지만 씁쓸함을 숨길 수 없었다. 현재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한 배우 한 명과 가수는 무죄로 가고 있는 분위기라 팬의 입장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이미지 실추는 안타깝지만요)
그들의 팬으로서 매일같이 업데이트되는 뉴스를 보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마약 투약을 확인하는 체모의 길이에 따라 기간을 특정할 수 있다는 것. 최대 10개월까지 마약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다는데, 10개월 전에 투약을 했다고 해도 마약은 워낙 중독성이 심하기 때문에 10개월 간 하지 않았다면 마약을 투약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의견이었다. 물론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모두 믿지도 않지만 그럴듯하다 싶었다. (팬으로서 그의 무결함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마약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 정도의 중독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마약은커녕 감기에 걸려도 감기약조차 잘 안 먹는 나라서 어떤 약물에 중독되는 현상이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그러다 문득 내게도 그런 시기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의지하고 믿었던 사수들이 전부 떠나가고 매일 폭탄이 떨어지는 살얼음판이었다. 나는 여전히 신입사원의 위치이면서 5년 차 주임의 일을 모두 떠맡았다. 내 능력이 닿지 않는 일을 하느라, 그러면서 틈틈이 불려 가 혼나느라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평균적으로 퇴근하는 시간이 10시였다. 할 일을 모두 마치고 조용한 휴게실로 가서 그날 쓴 컵과 텀블러를 설거지하고 있으면 다른 팀의 야근 동료가 와서 인사를 나누는 게 루틴이었다. 10시가 되기 전에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오늘은 일찍 가네요?라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녹초였다. 대충 씻고 가만히 앉으면 속에서 뭔가가 들끓었다. 내가 이러려고 회사를 다니나 싶다가 그래도 돈을 벌려면 다녀야지 싶다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상사의 눈알을 떠올리다가도 내가 참아야지 별 수 있나 하는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럼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독립을 하면서 아무 때나 혼술을 할 수 있다는 로망을 가졌지만 이런 식의 혼술은 로망과 거리가 멀었다. 봉지과자나 초콜릿, 혹은 빵 같은걸 안주삼아 맥주 한 캔을 마시고 나면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까 이만 자야지 하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 맥주는 두 캔이 될 때도 있고, 소맥이 될 때도 있었다. 야근이 일찍 끝나 시간이 많을수록 주량은 늘었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 술은 밥을 먹을 때도 곁들이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놀 때는 더 많이 마셨다. 회사 사정이 불안하고 심란할수록 술을 가까이했다. 오죽했으면 23년 새해의 다짐 중 하나가 ‘술 매일 마시지 않기’였다. 많은 양은 아니어도 매일 술이 있어야만 그나마 잠들 수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게 나의 중독이었다. 원래도 술을 잘 마시는데 매일 마시니까 주량이 늘어서 그 시기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마음의 힘듦과 우울감이 계속해서 편해지는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그건 사실 편해지는 게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출근하는 직장인 여성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나와 시원하게 들이키며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오늘 하루를 포기합니다.’라고 고백한다. 나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매일 술을 마셨던 것 같다. 그날 하루를 포기하는 마음으로. 포기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소리 지르는 상사도, 잘못을 내게 떠넘기는 동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들도 일단 포기하면 그럭저럭 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포기와 좌절감은 매일같이 술을 불러왔다.
나는 요즘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술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에 간혹 맛있는 음식에 곁들이긴 하지만 간격이 2주가 될 때도, 한 달이 될 때도 있다. 대학생 때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마시는 술은 맛이 없어도 즐거웠는데 좌절과 비참함, 우울과 속상함으로 마시는 술은 달아도 쓸쓸했다. 더 이상 나쁜 기분으로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술은 즐겁고 행복하고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먹기로 정하고 잘 지켜나가고 있다. (100%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위에서 말했던 드라마의 다음 장면에는 이런 대사가 이어진다.
그런데 아마도 마음속 어딘가에 포기가 부족했던 모양이에요.
나도 그랬나 보다. 마음속 어딘가 포기가 부족해서 나와 내 하루와 내 삶을 포기하지 않고 퇴사를 결정했는지 모른다. 무언가에 의지하고 중독되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왔을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중독이 있을 것이다. 그게 어떤 마음으로 비롯된 것이든 부족한 포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완전히 놔버리지 않는 부족한 포기. 그게 있다면 다시금 새 펜을 사서 새 글을 쓰는 새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