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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무 Dec 20. 2023

나의 동네친구들



  고백하자면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아니, 그보다는 ‘적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같은 동네에서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은 다른 고등학교를 가면서 멀어졌고 고등학교에서 친하던 친구들도 내가 재수를 하고 각자 다른 대학을 다니면서 멀어졌다. 여전히 어린 시절 친구들과 그룹을 이뤄 잘 지내는 이들을 보면 부럽고 서글퍼진다. 나의 인간관계가 이토록 좁은 건 다 내 탓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낯을 가리고 마음을 잘 내보이지 않는 성격 때문에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기보다 몇몇의 맞는 사람과만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나는 넓고 얕은 관계보다는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좁고 깊은 관계는 내 인간관계의 자랑이자 역사였기에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 속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인간을 미워했다가 결국은 나 자신을 미워했었다.     


  회사에서 상사로부터 힘든 일을 당할 때, 딱 한 번 십 년 간 관계를 유지해 온 친구에게 힘듦을 털어놓았다. 그는 나를 오래 보아왔고, 내 상황도 잘 알고 있으니 내 고통에 공감하고 위안을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나도 힘들다’였다. 위로를 받고자 했지만 위로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뒤로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대가 실망이 되고, 실망의 기분이 가득 차 친구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느낌이 싫었다.  

  퇴사하고 일 년이 넘게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가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주변에서 누군가 물으면 내 의지대로 일을 할 수 없는 게 싫다, 어느 회사나 다 비슷할 것 같아서 싫다, 같은 답을 내놨지만 나도 제대로 몰랐다. 왜 나는 이렇게도 회사에 가기 싫은지, 대체 시간과 돈만 버리며 뭘 하고 있는 건지, 무슨 생각인지. 내 우울감의 밑바닥에 뭐가 있는지 나도 몰랐다. 

  

  나의 전 직장 동료들, 이제는 모두 퇴사하고 그저 같은 동네의 친구들이 된 이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나 어제 사람인 들어가서 이력서 수정했어. 자소서도 새로 쓰고 있어.’라고 말하자 그들은 다들 놀라며 응원과 축하를 해줬다. 퇴사한 지 일 년이 지난 사람이 이제야 이력서를 쓴다는데 그렇게나 응원받을 일인지 어리둥절해하자 친구 1이 말했다.     


  “그거 대단한 일이지. 시작하는 게 어려운 건데.”     


  그들과 만나면 늘 즐겁게 한바탕 웃고 배가 터지게 먹고 다 같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동네친구들이니까. 친구 2는 새롭게 시작한 일에서 일자리가 생기면 내 얘기를 해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상사의 텃세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나까지 생각해 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돌이켜보니 그들은 내가 부서를 옮겼을 때부터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전 부서에서의 일로 마음이 고단하고 눈치가 보였던 나는 내내 풀이 죽어 있었다. 새롭게 옮겨 간 부서는 분위기가 밝았으며 서로 똘똘 뭉친 친밀함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인간관계에 진절머리가 나서 그냥 일이나 하자고 마음을 닫았다. 그들은 가시를 잔뜩 세우고 웅크려 있던 내게 같이 저녁 먹자고, 야근하지 말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상처받기 싫어서 몇 번 내치던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다시 웃고 먹고 마시고 떠들며 일다운 일도 해볼 수 있었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더 빨리 소진되었을 것이다. 

  흔히들 직장 동료들과는 사적으로 많이 친해지지 않는 게 좋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진짜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렵다고 한다. 나도 그 말에 기대어 오래된 친구들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아닌데 싶은 순간에도, 친구라는 이름 아래 상처만 받아도 관성처럼 그들을 붙잡았다. 그들이 멀어지면 내가 쏟았던 시간, 노력, 애정 같은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니까. 그렇게 친구 하나를 잃으면 또 내 탓이니까. 회사를 가기 싫었던 이유들 중에 진짜는 가장 밑에 깔려 있었다. 사람이 무서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또 괴롭힘 당하는 게, 끈끈하게 맺어진 그룹에서 겉돌게 되는 게, 다시 나를 탓하게 되는 게. 


  사람을 잃은 줄만 알았던 시간 동안 얻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동네친구들을 보면서 다시금 깨닫게 됐다. 친구 3은 내 생일파티 겸 송년회를 하자며 집으로 초대했다. 친구 3은 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음식을 손수 준비했고 나머지는 각자 술과 먹을 것을 챙겨 모였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많이 먹고 웃고 떠들었다. 술에 조금씩 취한 채로 영하의 날씨에도 노래방에서 땀을 흘리며 춤추고 노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추웠는데 양손이 무겁고 마음이 따뜻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각자 준비한 선물들을 안겼다. 청승맞게 눈물을 주룩 흘리며 겨울 밤길을 걸었다. 나의 안부를 묻고, 현재를 걱정해 주고, 미래를 응원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그간의 인간관계에서의 실패가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동네친구들이 있는 애들이 부러웠다. 드라마에서처럼 ‘야, 잠깐 나와. 편의점에서 맥주나 한 캔 하자.’라고 할 수 있는 동네친구들. 이제는 내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모두 회사 때문에 다른 동네에서 이 동네로 넘어와 회사를 등지고 동네친구들이 되었다. 언제까지 모두 이 동네에 살지는 모르겠지만 동네친구들 덕에 나는 다시 힘을 낸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세상으로 나아갈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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