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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새 Winter Robin Aug 21. 2023

냉장고 파먹기? 책장 파 읽기!

꼭꼭 숨어라, 눈에 띄면 먹힌다 (냠냠)

냉장고 파 먹기,라는 표현은 참 웃기다. 다가오지 않는가!


나는 냉장고도 파먹지만, 파 먹을 게 하나 더 생겼다. 시작은 요즘 미니멀리즘에 대한 글을 읽으면 서다. 미니멀리즘에 대해 따로 찾아본 게 아니라 이를 실행해 보는 작가들의 에세이나 일화를 우연히 본 것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글을 쓰는 모습은 퍽 매혹적이어서, 방정리나 해볼까 싶어 내 방을 둘러보았다. (글이 안 써진다고 핑계 대며 미루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청소를 시작하는 것이다.) 난감하다. 내 방에는 뭐가 이리도 많은 것일까?


꽤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 사적인 공간을 찬찬히 관찰하니 곧 답이 나왔다. 옷이나 잡동사니와 함께 내 방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책이다. 오랜만에 책정리를 하려고 보니 안 읽은 게 너무도 많다. 읽다만 것도 있고, 다 읽긴 했는데 무슨 내용인지 잊은 책도 수두룩하다.


Unsplash. 그러나 내 실제 책장과 바닥도 만만치 않다.


스스로 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다 읽지도 못할 책들은 도대체 왜 산 것이며, 읽겠다고 마음먹고 지갑을 열었으면서 기어코 책을 즐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허영심인지, 지독한 낭비인 건지, 감히 버리지도 못하는 책 덕에 이중으로 꽂힌 책장부터 바닥에 쌓인 책의 탑까지 발 디딜 틈이 없다. 자책이 이어지더니 죄책감이 되어 마음이 묵직해졌다. 잠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털썩, 의자에 앉아 멍하니 무수히 많은  제목을 눈으로 훑었다.


그래, 그때 저 책을 샀지.
여전히 못 읽었다니 한심해.
저건 읽다가 말았는데.
언제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는데,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이것도 일종의 중독인가?


그러다, 당장 읽고 싶은 책을 발견했다.


맞다, 이런 책도 샀었지?!


한번 눈에 들자 손부터 가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 읽기 시작한 책은 아주 오래전에 산 책으로 원제는 <Confessions of an Ugly Stepsister> (자체 번역: <못난이 새언니의 고백>) 그레고리 매과이어 (Gregory Maguire)라는 작가의 1999년 작품이다. 


매과이어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오랜 시간 흥행한 <위키드 (Wicked)>의 원작자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를 다시 쓴 소설인데, 이걸 사면서 옆에 있던 <못난이 새언니의 고백>도 같이 구입했다. 십여 년 전이었나, 화려하고 매혹적인 표지와 뒤표지의 설명을 보고 당장 집어든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읽기 시작하자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신데렐라를 다시 쓴 이야기로, 튤립 열풍이 불던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중점적으로 뽑아 쓴 내용은 아름다움과 추함, 그리고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한 사람들과  사회적 가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홀릴 듯이 재밌고 중간중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볼 정도로 꽂히는 문장들도 있는데 이건 나중에 간단한 서평으로도 남길 예정이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후, 오래전에 접었던 페이지를 발견했다. (내 소유의 책은 접기도 하고 메모도 하고 가방 속에 막 던져 넣기도 한다. 내 것이란 참 사랑스럽다.)


전에는 여기까지 읽었구나.
난 읽은 기억이 아예 없는데.


옛날의 나와 어쩌다가 다시 마주한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든다. 접힌 구간을 넘어가 전보다도 더욱 깊숙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이야기가 내 안으로 들어온 건지도 모르겠다.


관계가 깊어지는 것 또한 때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타이밍이라는 것. 여러 인간관계나 기회 등등 많은 것이 타이밍에 의해 좌지우지되는데, 책과의 연도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보게 된 책으로 인생이 바뀔 수도 있지만,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책이 내게 다가올 때도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수년 전에 샀던  <The Three Musketeers (삼총사)>를 우연히 발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 샀을 때에는 몇 페이지도 못 읽던 것을 먹으면서까지 읽었다.


그보다 또 더 어렸을 때는 집에 있던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을 읽다 말았는데, 그 몇 년 뒤에는 우연히 그걸 다시 보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을 도서관에서 다 챙겨보기도 했다.


그때 못 읽었다고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길 필요가 없구나.


적어도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은 과거의 내가 사두고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즐거움을 주는 걸 지도. 지금 산 책도 당장 안 읽더라도 언젠가는 더 뜻깊게 읽게 될지도 모른다.


책을 쟁여두고 못 먹었으니 괜히 한심하다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찔려하지 기로 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앞으로 내 풍성한 책장을 야금야금 파먹어야겠다.


Unsplash

+ 추가:


<못난이 새언니의 고백>며칠 전에 다 읽어서, 같은 작가가 쓴 <위키드>를 다시 집었들었다. 예전에는 끝까지 못 읽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안 그래도 첫 장에 2012년에 내가 써놓은 메모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다 읽겠다는 거였다. 그때도 여러 차례 읽으려다 중도하차했나 보다.


첫 장의 메모 아래 코멘트 하나를 추가했다. 이번에야말로 완독 하겠다고. 이번이 완독 할 때인지 아니면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 뒤가 그때일지? 어느 쪽이든, 상관 않기로 했다.


한 입만 먹어도 맛있을 거고,

책장에는 여전히 파먹을 것들이 빽빽이 많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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