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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우 Mar 02. 2023

I의 사랑법

그는 매우 내향적이고, 신중한 성격이다. 나는 매우 외향적이고, 즉흥적이다. MBTI 검사를 하면 나는 I 문항이 0점이 나올 정도이고, 그는 E 문항 점수가 매우 낮은 극 E와 극 I이다. 극 I인 데다 착하고, 겸손하여 먹이사슬의 하위권에 있는 초식 동물 같기도 하고, 크고 맑은 눈망울과 긴 다리가 잘 어울려 친구들에게 그는 사슴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더니 친구들은 그의 별명을 사슴으로 정하였다. "사슴씨랑은 요즘 어때?"하고 말이다.


극과 극은 이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 달랐지만 그래서 더 끌렸던 것인지, 혹은 필요했던 것인지 처음부터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러나 직설적이고, 표현을 잘하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의 표현은 너무도 모호하고, 어려웠다. 친구가 많아서 친구들 성향이 다양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외향적인 친구들이 많아서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안 좋아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의 데이트를 하고도 별 말이 없어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한 친구의 조언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그 남자가 시간이 몹시 많아?"

"아니."

"그럼 그 남자가 돈이 막 미치게 많아?"

"아니. 그냥 직장인이지."

"우리가 30대 후반인데 너는 마음에 없는 사람을 시간 내서 만나겠어?"

"에이~ 절대 안 만나지."

"답 나왔네, 뭐."

"아... 넌 정말 현명하다."


그래도 역시 손 한 번 안 잡고, 평일에 자주 연락도 하지 않는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연히 과에서 가장 친했던 후배와 남편이 동창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빈아, 너 사슴씨 알아?"

"알죠. 공부 엄청 잘했는데. 그런데 왜요, 누나?"

"아니... 나 그 사람이랑 소개팅을 했는데..."

"와하하하.. 누나, 사슴이 잘 지내요? 뭐해요? 대학원 가서 박사 했죠?"

"아니. 직장인인데..."

"와~ 철학과 같은 데 가서 박사해야 하는데. 사슴이 진짜 착해요. 결혼해요, 누나!"

나의 결혼을 늘 응원하는 후배님이다.

"그게 아니라.. 어휴, 결혼은 무슨 결혼. 나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누나, 이 나이 먹도록 착하고, 잘생기고, 직장도 탄탄한 사람이 결혼을 안 했으면 센스까지 있기를 바라면 안 되죠. 누나, 결혼해요!"

후배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랑 결혼을 하라고 했다. 내가 고등학교 교사이기에 남고 동창이 이 정도 말했으면 정말 성품이 좋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알겠는데, 그 남자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


그와 만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 빼빼로데이가 있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기 직전에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내가 고디바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고디바 초콜릿을 수줍게 내밀었다. 빼빼로 보다는 초콜릿이 나을 것 같았다면서. 그날의 분위기로 보았을 때 이것은 그린 라이트라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아직은 아니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다음 해 밸런타인데이에는 코로나 때문에 자가 격리를 하던 그에게서 핑크빛 립스틱과 하트 모양의 틴 케이스에 든 초콜릿 기프티콘이 도착했다. 빼빼로 데이에도, 밸런타인데이에도 고백의 말이나 편지 같은 것은 없었다. 스스로 틴 케이스가 하트 모양인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화이트데이가 왔다. 내 차를 타고 데이트를 하고 그를 집 근처에 내려주었는데 뒷자리에 둔 가방을 몹시 느리게 내리고 있었다. 집에 와서 핸드백을 내리려고 뒷 좌석을 보니 하얀색 초콜릿 상자와 우산이 있었다. 꽤 오랫동안 쓴 것 같은 작은 우산.


"사슴씨, 차에 뭐 놓고 내린 거 없어요? 가져다줄까요?"

"선물이죠! 사탕보다 초콜릿을 좋아할 것 같아서요."

"아니, 쓰던 것처럼 보이던 우산이 있는데요?"

"앗! 그건 선물 아니에요. 가방에서 떨어졌나 봐요."


참지 못하고 와하하하 크게 웃어버렸다. 초콜릿을 몰래 두고 내리려다가 우산까지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극 I와의 연애는 몹시 애가 닳는 일이었지만 때때로 이렇게 재미있었다.


어떤 사람의 사랑은 말로 담기지 않고, 담을 수 없기도 하다는 것을 그를 만나고 깨닫게 되었다. 그의 방법을 존중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급하고, 빠르고, 직설적인 내게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인정하고,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의 생김새가 각각 다르듯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주변 사람들의 조언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믿기로 했더니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고, 비로소 온전히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고백 한 번 받지 못한 채, 우리는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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