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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밀 Oct 18. 2022

잊혀야 한다는 마음으로

새삼스럽게 쓴다


 한동안 쓰는 일을 멀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쓸 수 있는 멘탈 상태가 아니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아가 치밀면, 오히려 속사포로 입털듯 활자도 털어낼 수 있을거라 착각했다. 속으로만 애써 눌러 담은 말들을 온라인 지면으로 끄집어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이킬 수 있는 감정으로 금세 회복될 거라 믿었다. 철저히 오산이었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의 저자 이윤주는 "글을 씀으로써 많은 것을 견딜 수 있게 됐지만, 글을 쓰는 일이 다시 많은 것들의 '견딜 수 없음'을 일깨우는 역설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부연하지 않았다.

 그간의 내가 "말'이 아닌 '글'을 통해 복잡 미묘한 감정을 해소하려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글'이 아닌 '말'을 통해 쌓인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정제된 글에 의존하는 인고의 시간조차 사치같았다.

 덕분에 나의 글쓰기가 언제 자발적으로 물꼬를 트는지도 확실히 알게 됐다.




 "사는 게 징그러울 때마다 책을 펼쳐 한 고비를 넘긴다"는 이윤주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당장 눈앞에 놓인 대여 책 두 권과 갓 선물받은 세 권의 책으로 시선이 쏠렸다.

 2주면 너끈히 읽을 줄 알던 대여 도서들은 머쓱하게 자리만 차지하는 꼴이었고, 읽고 싶던 새 책들은 무작위로 페이지를 열어 발췌독만 해가고 있었으니 이 모든 게 적어도 내겐 책에 대한 도리를 저버리는 몹쓸 짓이었다.

 어릴 때 국정교과서조차 1쪽부터 침 발라가며 읽던 성실하게 닫힌 개미과였다. 애초에 엑기스만 가려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녔다면, 지루한데 요점도 안보이는 마의 첫 구간을 파헤치다 결국 잠드는 일은 덜했겠지. 덕분에 노트에 적힌 알짜배기 요점은 기타 안중요한 요점에 절묘히 버무려졌고, 형광펜을 여러 겹 덧대어 너덜너덜해져야만 그 존재감이 드러났다. 노트 겉면에 '요점노트'라고 적기에는 어쩐지 무리수일 시절 노트, 그나마 필체라도 유려하려고 애쓰던 흔적들. 아 쓸데없이 또 파고들었다.

 서두에서 흥미를 못 느끼면 차라리 책을 덮는 쪽에 가까운 내게, 아무튼 발췌독은 지속불가능 영역이었으니까.



 살면서 누군가가 징그러워지는 지점은, 지나친 네 위주의 방식을 절대다수에 적용하려는 이기심을 연거푸 목격할 때다. 그때 나는 인간을 좀 더 촘촘하게 나누고 그 행간을 드러내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한다.


 남을 이기적으로 대상화하는 프레임을 씌운 자리에 본인 기준의 왜곡된 이타심을 슬쩍 배치하는 셈이야 말로 얼마나 이기적인 행보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사전에 직시하고, 안타깝게도 나는 이 한계 내에서만 겨우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상향조정 불능 상태라고 미리 상대에게 알린다면, 누군가의 징그러움을 목격할 일도 줄어들 것이다.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적을 '악'으로 규정해야만 자신을 '선'이라 믿고 자족할 수 있는 이들의 근본 감정은 "원한"이고, 그것은 언제나 반작용에 불과한, 반동적인 행위만을 낳기 때문에 열등하고 위험하다는 논리를 언급했다.

 반작용은 결국 상대의 행위 그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순간의 열등한 감정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해소를 원한다면, 스스로를 규정하는 잣대가 과연 공정했는지부터 살필 일이다.


 손에 쥔 말들이 빗장을 풀고 다시 날갯짓하게끔 애써 이 공간을 부여잡는다. 주말 동안 생각지 못한 서비스 장애로 인해 브런치 접속에 번번이 실패했고, 그러는 동안 '글' 쓰며 위로받던 날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비록 음식점에서 늘 먹던 걸로 주문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 멘탈 상태에 구애받지 않고 그저 묵묵히 온라인 지면 한 구석을 내어준 덕에 그럭저럭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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