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n Sep 28. 2020

지중해 그리고 응급실

2016년의 이도와의 첫 번째 여름휴가를 무사히? 즐기고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두 번째 여름휴가를 맞이하게 되었다. Barcelona 바르셀로나 근교의 작은 마을에 사는 지인의 제안으로 Home Exchange 집 바꾸기를 하게 되었는데 말 그대로 서로의 집을 바꿔 휴가를 즐기는 것이다. 베를린이라는 대도시에 사는 우리 가족과 Barcelona 바르셀로나 근교의 해안도시, Altafulla 알타푸야라는 조그만 마을에 사는 지인의 가족은 서로가 가지지 못한 환경을 잠시 동안 교환하여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며칠 내내 연락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세우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알타푸야에 처음 가는 우리 가족을 위해 지인은 마을을 보여주고 집 열쇠를 직접 건넨 뒤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향하는 계획이었다. 


Tarragona 타라고나 시내로 우리를 마중 나온 지인의 차를 타고 지인의 가족이 기다리고 있던 알타푸야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은 옅은 바다향기를 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곧 눈 앞에 펼쳐질 바다를 미리 느끼게 해 주었다. 상상하던 알타푸야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곧 현실로 다가왔고 지인의 가족은 작은 해안가 마을의 푸근함을 닮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비린내가 아닌 바다향이 풍기는 신선한 해산물 요리와 그에 어울리는 산미를 품은 화이트 와인을 즐기며 두 가족은 즐거운 점심을 보냈다. 아주 훌륭한 첫 식사로 이미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알타푸야의 모든 것이 좋게 다가왔다. 사실 바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좋았다. 함께 해변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와 또다시 먹고 마시고... 


다음날 아침 지인과 그의 가족은 우리와 함께 마을광장 근처의 카페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자가용을 타고 긴 여정에 나섰다. 베를린으로! 우리 가족은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작은 마을의 해변 치고는 꽤나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따라 걸었다. 그 끝자락의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지인의 집은 각 층이 아담한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비슷한 형태의 하얀 집들이 뒷 뜰에 위치한 야외수영장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었다. 쓰러지듯 낮잠에 빠진 이도를 3층 침실에 눕힌 후(물론 베이비 폰을 켜 놓은 채로.) 나와 마리는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남부의 뜨거운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던 텅 빈 수영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여유로운 미소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여유로운 미소를 얼마나 흘렸을까? 베이비폰에서는 이도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일광욕을 즐기던 마리는 3층 침실로 이도를 데리러 갔다. 그리곤 즉시 마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빠, 빨리 와봐!”

“왜, 무슨 일이야?”

“이도가 이상해!”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수영장에서 뛰쳐나온 나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마리가 이도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도의 창백한 얼굴에는 미처 다 토해내지 못한 액체가 입 주변에 흥건하게 묻어 있었고 눈을 뜰 힘마저 없는 듯 우리를 잠시 동안 응시하던 눈은 다시 힘겹게 감겼다. 우리 둘은 동시에 목소리를 높여 ‘이도’를 외쳤다. 잠시 시야가 하얘졌고 머리는 텅텅 비어 버렸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그 짧은 순간 하지만 미치도록 길게 느껴졌던 그 순간의 정적을 깬 것은 마리였다.


“오빠, 우선 택시를 불러서 마을의 병원에 가자. 택시를 불러줘. 난 우선 이도가 정신 차리도록 해볼게.”

“알았어.”


이도의 입 주변을 닦아주고 물도 먹여보며 이도를 다독이는 마리는 나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그랬다. 마리는 엄마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콜택시를 부르려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이 작은 마을에 Siesta 씨에스타 시간에 호출할 수 있는 택시는 없는 듯했다. 그때 문득 지인이 남긴 한국인 부부의 비상연락처가 생각났다. 그들은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은퇴 후 이 곳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서둘러 전화를 했고 다행히 아저씨가 전화를 받았다. 지인의 친구라는 말로 내 소개를 짧게 하자마자 아이가 정신을 잃어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택시가 안 잡히니 도와줄 수 있냐고 다급하게 물어봤다. 그 아저씨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생면부지의 한국인이 카탈루냐의 한 작은 마을에서 전화를 하자마자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하니... 


노부부가 지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이도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간간히 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우리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자마자 이도의 증상을 물은 후 상태를 살펴보던 아주머니가 이야기했다.


아이가 더위를 먹었네. 내 생각에는 집에서 쉬면서 수분을 충분히 보충해 주면 나을 것 같은데. 놀랐겠지만 크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도 병원에 가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 그래, 알아. 무슨 마음인 줄 알아. 우리도 애를 키워봤으니까. 그럼 지금 마을에 있는 병원에 가보자고.” 


우리는 그들의 차를 타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작은 의원에 가보았지만 씨에스타 시간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직은 얼굴이 창백한 이도를 품에 안은 채 급한 대로 근처의 약국에 들러 그 의원이 언제 다시 문을 여는지 혹은 근처에 다른 병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글쎄요, 언제 다시 열지는 모르겠고 다른 병원은 타라고나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급한 일인가요?”

“네, 아들이 더위를 먹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긴 했는데 아직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그래요? 그럼 내가 의사한테 전화를 해보죠. 가려던 의원의 의사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짧은 전화 통화를 마친 젊은 약사는 우리에게 밖은 더우니 약국 안에서 5분 정도 기다리다가 의원에 가면 의사가 와있을 거라고 했다. 씨에스타를 포기하고 병원으로 달려온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이도를 진찰하더니 아직 많이 어려서 혹시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큰 병원의 응급실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에게 타라고나 시내에 위치한 종합병원 주소를 건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인가?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얼른 추켜올리고 의원 앞 광장에서 씨에스타를 즐기고 있던 택시기사를 재촉해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으로 달렸다. 혹시라도 자신이 도움이 될지 모르니 함께 가자고 택시에 오른 한국인 아주머니와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휴가를 위해 1년을 일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