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n Sep 24. 2020

여름휴가를 위해 1년을 일하다


전 세계 어딜 가더라도 독일 여행자들은 꼭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일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여행을 즐긴다. 그중에서도 여름에 즐기는 여행은 특별하다. 보통 3주에서 4주 정도를 할애하는 긴 휴가기간도 한몫하겠지만 그보다도 어둡고 축축하고 춥고 무지하게 긴 겨울 내내 그리워했던 햇살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휴가를 가기 위해 1년 내내 일하고 저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독일 사람들에게 여름휴가는 특별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반대로 난 여름휴가철인 7,8월에 여행 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딜 가나 붐비고 비싸고 거기에 무더위까지. 사실 여행하기에 그 보다 나쁜 조건은 없지만 이도가 다니는 키타를 비롯해 대부분의 키타 여름방학이 보통 7, 8월이다. 마리 역시 여름휴가를 기다리며 열심히 일했고 일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의 휴식 (물론 아직 어린 이도와의 여행은 휴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이 필요했기에 2016년 우린 이도와의 첫여름휴가를 계획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혹은 이미 성인이 되어 버린 자식을 둔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아이가 예닐곱 살이 되기 전에 다니는 장거리, 장기간 여행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들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나중에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기억도 나지 않을 텐데 뭣하러 힘들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많은 돈과 시간을 써가며 여행을 다니냐는 뜻이다. 나중에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나의 의견은 많이 다르다. 기억에 남으면 더욱 좋겠지만 그 보다 그 순간과 시간을 함께하며 느끼고 즐기는 것이 풍부한 영양분이 되어 아이를 성장시키지 않을까? 더욱이 지금 할 수 있다면 나중으로 미룰 이유가 없다. 나중이 되면 여행을 가지 못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테고 갈 수 있으면 또 가면 된다. 참을성 없는 성격 때문이겠지만 난 ‘나중’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지금, 바로 지금 해야 한다. 어쨌든 나중에 사진이라도 보며 지난 시간을 추억할 수 있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 가족은 이도가 6개월이 되고부터 1년에 최소 2번 이상의 여행(주말이나 국경일에 떠나는 2,3박짜리 여행은 제외)을 즐기고 있다. 물론 매 번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로 고생도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지만 ‘인생이 그런 거 아닌가? 어찌 계획된 대로만 순탄하게 흘러갈 수 있겠는가...’하며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고 꿈꾼다. 여행은 내게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존재이며 내 인생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였는지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했던 여행의 순간순간이 지난밤 꿈처럼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이유로 이사를 그리고 여행을  많이도 다녔다. 그때마다 새로운 환경이 낯설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 풍부한 경험과 느낌들이  어린 시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시간들이 많은 이미지들로 남아있지 않은  아쉬울 뿐이다. 지금이야 디지털카메라나 스마트폰 혹은  외의 전자기기로 손쉽게 사진이나 영상물을 남길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필름 카메라나 어깨에 둘러메고 가야  정도로 커다란 비디오카메라가 추억을 이미지로 남길  있는 수단의 전부였으니까.


이도와 함께하는 첫여름휴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였다. 겨울에 비해 짐이 적긴 하지만 유모차를 비롯한 유아용품들을 나열해 놓고 보니 비행기나 철도 혹은 그 외의 대중교통수단으로 이동하기엔 휴가가 아니라 극기훈련이 될 것 같아서 자동차로, 렌터카로 이동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휴가지를 정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선 지중해가 펼쳐진 시칠리아까지 비치보이스의 노래를 들으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구글 지도에서 거리를 확인하곤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2300km... 그럼 어디를 가볼까? 주말 나들이가 아닌 여름휴가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 독일 내의 도시보다는 이국의 정취가 풍기는 남쪽으로 가고 싶었다.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독일의 남쪽 지방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거리상으로도 비교적 현실감이 있어서 (800km 내외) 범위가 쉽게 정해졌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널리 알려진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도 가볼만하겠지만 내겐 역시 미식의 나라, 프랑스가 매력적이었다.  


알자스. 그 이름에서 풍기는 정겨움과 편안함은 나만의 개인적인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향기롭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이 물처럼 흔하고 (실제로 현지의 카페나 식당에 가보면 물이나 와인이나 가격차이가 거의 없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맥주는 베를린에 비해 놀랄 정도로 비싸다.) 마리가 좋아하는 * Tarte flambée 타르트 플랑베의 고향이며 둔탁한 독어 대신 감미로운 불어가 들리는 곳. 게다가 근처에 마리와 함께 꼭 가보고 싶었던 Vitra design museum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을 비롯한 여러 뮤지엄과 갤러리가 위치하고 있어 우리 세 식구의 첫여름휴가 장소로 낙점되었다.


* 프랑스 알자스 지방과 국경을 맞댄 독일 서남부 지방(독일에서는 Flammkuchen 플람쿠헨이라 불린다.)의 전통음식. 얇은 밀가루 반죽에 여러 가지 토핑을 얹어 구워낸 일종의 파이로 피자와 유사하며 프랑스 유제품인 Crème fraiche 크렘 프레슈, 양파, 베이컨을 토핑 한 메뉴가 가장 대중적이다.


“숙소는 도시보다는 와이너리 근처의 숲이나 산속에 있으면 좋겠어. 아침에는 와이너리나 숲 속을 거닐다가 점심은 근처의 한적한 마을에서 먹고 돌아와서 이도랑 낮잠 자고. 오후엔 장을 보러 가야지. 어차피 이도랑 밖에서 두 끼를 해결하는 건 힘드니까 저녁은 숙소에서 내가 준비할게.”

“그럼 호텔보다는 조리가 가능한 곳으로 숙소를 알아봐야겠네. 근데 오빠 휴가 가서도 매일 저녁 준비하는 것 귀찮지 않겠어?”

“전혀! 현지 재료로 어떤 요리를 해서 어떤 와인하고 함께 즐길까 생각하니 벌써 기대되는데. 귀찮아지면 밖에서 사다가 숙소에서 먹어도 되고.”

“이도가 차 타는 걸 좋아하니까 드라이브를 가거나 근처의 다른 도시를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있는 Weil am Rhein 바일 암 라인이라던지.”

“좋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갔다가 Basel 바젤에 들러 여러 뮤지엄이나 갤러리도 둘러보고.”


우리 가족의 첫여름휴가는 그렇게 그려지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8년 4월 27일, 그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