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to Sunday in Berlin
2014년 5월 베를린. 마리는 1주일 간의 휴가를 내어 나와 함께 ‘베를린의 게으른 산책가’가 되기로 한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외로운 행성’ 같은 가이드북에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나 그와 비슷한 타이틀을 달고 소개된 명소보다는 평소 우리 커플이 즐겨 찾는 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일주일을 여유롭게, 천천히 아니, 게으르게 즐겨보기로 했다. 그 첫날인 월요일. 직장인들에게는 가장 힘든 하루가 되겠지만 나 같은 프리랜서나 마리처럼 휴가를 즐기고 있는 사람에겐 산책을 즐기기 가장 좋은 날이다. 오랜만에 함께 즐긴 늦잠에서 깨어 커튼을 거두고 창문을 열었다. 어느덧 수북하게 자라난 가로수의 나뭇잎이 창문밖에 한가득 펼쳐져 잠이 덜 깨었을 때는 마치 숲 속 어딘가에 있는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신선한 공기와 새소리가 상쾌한 월요일 아침을 메우고 있었다.
“오늘 어디 가고 싶어?”
“글쎄.”
“쿠담 Ku'damm 은 어때?”
“휴가 첫날부터 회사가 있는 동네를 가자고?”
“날씨 좋으니까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 카페 가서 간단하게 브런치 먹고 얼마 전에 오픈한 비키니 베를린 Bikini Berlin 도 가보면 재밌을 것 같아서. 지난주에 가봤는데 나름 괜찮더라고. 회사 쪽은 쳐다보지도 말고.”
“음... 괜찮을 것 같은데.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 카페 가든에 앉아 브런치로 휴가 첫날을 시작하는 것.”
“그럼 우리 슬슬 나가볼까?”
쿠담 Ku'damm (Kurfürstendamm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 은 베를린 서쪽 지역의 대표적인 고급 쇼핑가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Kaiser Wilhelm Gedächtniskirche (U1 Kurfürstendamm)부터 약 3.5km에 걸쳐 대형 쇼핑몰, 럭셔리 부티크, 호텔, 레스토랑 등이 몰려 있으며 베를린의 샹젤리제 Champs-Élysées 라고도 불린다. 오래전부터 부유한 현지인이나 러시아 사람들이 쇼핑을 즐기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요즈음에는 전 세계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점점 부유한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카데베 Kadewe 같은 고급 백화점은 물론 초고가 럭셔리 부티크에는 중국인 혹은 중국어가 가능한 직원이 배치되어 있어 돈다발과 신용카드로 무장한 그들이 마음껏 쇼핑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마리, 여유롭게 버스 타고 가는 것도 괜찮지?”
“그럼, 평일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차도 안 막히니까.”
“더욱이 지금처럼 2층 맨 앞좌석에 앉아서 가면 전망도 좋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풍경 감상하고 있으면 어느새 쿠담 Ku'damm 이지.”
“가로수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때에는 조마조마 하지만 나도 버스가 좋아. 물론 회사 갈 때에는 시간 제약이 있으니까 우반 U Bahn (베를린의 지하철)을 타지만.”
“그렇지. 버스 타고 가면 거의 두배 가까이 걸리니까.”
“얼마 전에 어느 신문에서 베를린 투어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M29번 노선이 소개 되었더라고. 베를린 동쪽과 서쪽을 오가며 많은 관광 명소를 지나가서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들이 많이 이용하게 된 대표적인 노선 중의 하나라고. 물론 관광객들한테는 100번 버스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워낙 붐비는 곳만을 운행하니까 안 타게 되더라고.”
“맞아. 나도 100번 버스는 웬만하면 피하지. 관광객으로 꽉 찬 투어버스에 가깝잖아. M29번은 난 주로 집에서 쿠담 Ku'damm 갈 때 이용하는데... 듣고 보니 그렇네. 유태인 박물관 Jüdisches Museum Berlin, 체크포인트 찰리 Checkpoint Charlie ,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 신 국립미술관 Neue Nationalgalerie, 카이져 빌헬름 기념교회 Kaiser Wilhelm Gedächtniskirche 등의 명소를 많이 지나가네.”
“보통 여행지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게 쉽지 않은데 M29 노선은 워낙 많은 명소를 지나다니니까 많이 알려진 것 같아.”
“맞아. 현지인들도 자신이 주로 이용하는 버스를 빼고는 모르잖아. 나도 베를린에 5년째 살고 있지만 M29 하고 TXL 공항버스 외에는 모르는데.”
“그리고 2층 버스를 타고 시내를 달리는 것만으로도 투어 하는 기분이 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되는 거고.”
“오늘같이 날이 좋은 날은 더욱 그렇지. 사파리 하는 기분이랄까?”
“도시에서 사파리를? 하긴 베를린은 워낙 자연친화적인 도시니까 그런 기분이 날만도 하겠네. 전 세계의 대도시 중에서 녹지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베를린이란 소릴 들은 적이 있어.”
“그럴만하네. 베를린은 어딜 가나 공원이나 잔디밭이 있잖아. 전시용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공원. 한국에는 잘 꾸며놓은 잔디밭이 망가질까 봐 대부분 출입을 금지하거든. 단지 관상용인 거지. 처음에 베를린에 와서 인상적이었던 게 사람들이 집 앞 공원 잔디밭에서 바베큐 그릴을 하면서 소풍을 즐기는 거였어. 멀리 갈 필요 없이 그냥 집 앞 공원에서 편안하게 가족과 또는 친구들과 즐기는 그런 소풍. 물론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뒷처리를 하고 안 하고 차이가 크지만 말이야.”
“난 반대로 서울에 처음 가서 조금 의아했던 게 바로 그거였어. 며칠 동안 돌아다니면서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공원이 없더라고. 며칠 만에 발견한 공원의 잔디밭은 잘 만들어 놓고 왜 못 들어가게 하는지. 물론 잘 가꾸어져서 보기에는 좋았지만.”
“세상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각보다 많아. 단순한 것 같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잖아. 그걸 다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어.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난 그냥 지금처럼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면서 살고 싶어. 그건 그렇고 버스 타고 느리게 가는 것도 좋긴 한데 배고프다.”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잖아.”
“뭐 먹을까...?”
“음... 가장 어려운 질문이야.”
“우리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 카페는 오후에 디저트랑 차 마시러 가고 브런치는 린트너 Lindner 에서 먹는 거 어때?”
“카데베 Kadewe 맞은편에 있는?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어?”
“디저트나 차는 괜찮은데 식사 메뉴는 가격 대비 별로인 것 같아서.”
“하긴. 리테라투어하우스 Literaturhaus Berlin 카페에서 식사할 때마다 돈이 좀 아깝다는 생각은 들어. 그 가격이면 맛있고 근사한 곳이 많으니까. 거긴 그냥 조용하고 아담한 정원에서 햇빛 맞으며 차 한잔 즐기러 가는 거지.”
“내 말이. 그럼 브런치는 린트너 Lindner 오케이?”
“그러자. 근데 린트너 Lindner 도 가격이 싸진 않잖아.”
“싸지 않은 게 아니라 비싼 편이지. 하지만 먹고 나서 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잖아. 이것저것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맞아. 먹고 싶은 걸 원하는 만큼만 주문할 수 있어서 좋아.”
“항상 많이 주문해서 문제지만.”
“특히 배고플 때 가면 더 많이 주문하잖아.”
“이번에 내리자.”
“벌써 비텐베아그플라츠 Wittenbergplatz 야?”
“응. 다 왔어.”
린트너 Lindner 는 빵과 와인, 치즈, 소시지 그 밖의 식료품을 취급하는 고급 체인숍으로 베를린의 중심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조리가 된 샐러드, 샌드위치 그리고 간단한 요리류를 중량에 따라 판매하며 약간의 돈을 더 지불하면 숍에서 먹을 수 있도록 접시에 담아 테이블로 가져다준다. 뭘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만 주문하면 되니까. 종류가 많아서, 항상 적정량보다 조금 더 주문하는 게 문제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밖에도 자리가 있네.”
“이 자리가 좋겠다. 마리, 여기 앉아 있어. 내가 사 올게.”
“난 슈파겔살라트 Spargelsalat 하고 나머진 알아서 골라줘.”
“알았어. 요즘 슈파겔 Spargel (독일의 대표적인 봄철 채소로 하얗고 굵은 아스파라거스) 철이라서 나도 먹고 싶었는데. 우리 자주 먹는 버섯 파스타 샐러드랑 연어구이, 그리고 미트볼이나 아니면 치킨윙같은 육류 한 가지 정도면 되겠지?”
“응. 육류는 오빠 먹을 만큼만 사. 난 아직 잠이 안 깨서 가벼운 걸로 먹을래. 음료는 압펠숄레 Apfelschorle (사과 주스와 탄산수를 섞은 독일의 대중적인 음료).”
“햇빛 아래서 잠 좀 깨고 있어. 맛있는 것 사 가지고 올게.”
“응. 고마워.”
커다란 유리 쇼 케이스에 진열된 음식들이 날 반겼다. 마리가 주문한 슈파겔살라트 Spargelsalat 만 해도 서너 가지나 되었고 그 밖의 온갖 음식들이 나의 빈 속을 괴롭혔지만 애써 정신을 차리고 처음에 계획한 메뉴에 집중을 한다. 린트너 Lindner 의 여러 지점 중에서도 카데베 Kadewe 맞은편에 위치한 이 곳 지점이 가장 많은 종류의 메뉴를 선보이고 있어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지점이지만 주문을 할 때는 항상 어렵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정도 선택의 폭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폭이 너무 넓어지면 더 이상 즐기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고민과 갈등 (물론 여전히 행복한, 적어도 긍정적인 고민과 갈등이지만)으로 이어지기 전에 내가 뭘 원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집중을 해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배가 많이 고플 경우에는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짜증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침내 유혹을 이겨내고 4가지의 음식과 마리의 압펠숄레 Apfelschorle , 나의 젝트 Sekt (독일산 스파클링 와인) 그리고 물 한 병을 주문하고 계산을 했다. 점원이 건네준 커다란 플라스틱 번호표를 받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벌써 주문했어?”
“어. 그냥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 주문했어.”
“많이 배고프구나? 평소 같으면 훨씬 오래 걸렸을 텐데.”
“지금 뱃속이 난리가 났어! 안 들려, 이 소리?”
“나도 갑자기 배고프네.”
“이제야 잠이 깼나 보네.”
“그런 거 같아.”
“휴가 첫날 기분이 어때?”
“일단 따뜻해서 좋네.”
“그리고?”
“음... 게으름 피울 수 있어서 좋고.”
“어떤 게으름?”
“이 시간에 느지막이 야외에서 브런치 즐기는 것.”
“그런 게으름은 정말 좋다!”
“어렸을 때는 게으른 게 무조건 나쁘고 부정적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느꼈었는데. 이젠 게으를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여유로움이랄까?”
“응. 사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게으름은 보통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 것 같아. 예를 들어 ‘게으른 브런치’ 어때, 뭔가 멋지지 않아?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지금처럼 햇살이 내리쬐는 노천카페에서 천천히 즐기는 여유로운 브런치가 연상되잖아.”
“멋지다. ‘게으른 브런치’. 자주 즐기고 싶다!”
“이번 주 내내 실컷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