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n Nov 05. 2020

베를린, 화요일 03

Monday to Sunday in Berlin

난 Astrud Gilberto의 음반을, 마리는 Francoise Hardy의 음반을 사들고 두스만 Dussmann을 나섰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햇살이 우리를 반겼다. 근처에 위치한 잔다멘마크트 Gendarmenmarkt는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 불리는 곳으로 커다란 광장의 중앙에 위치한 콘서트하우스와 양옆에 대칭으로 위치한 두 곳의 성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주변으로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중 2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루터 운트 베그너 Lutter & Wegner는 수준 높은 요리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고 있어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으로 같은 건물 1층에 4개의 다른 공간을 레스토랑, 레스토랑 겸 와인숍으로 운영하고 있다. 얇게 편 송아지 고기에 빵가루를 입혀 튀겨낸 오스트리아 음식, 비너 슈니첼 Wiener Schnitzel 이 가장 유명하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와인은 물론 제3세계의 와인까지 갖춘 방대한 와인 셀렉션으로도 유명하다. 날씨가 따뜻한 날에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젠다멘마크트 Gendarmenmarkt를 바라보며 음식을 즐길 수 있으며 배가 고프지 않다면 시원하고 상큼한 젝트 Sekt (독일산 스파클링 와인)와 함께 느긋한 오후를 즐기는 것도 좋다. 늦은 점심시간, 우린 야외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펼친다.


“오빠, 뭐 먹을 거야?”

“난 지난번에 먹었던 오리 가슴 구이.”

“그건 겨울 메뉴였잖아.”

“그래? 그럼 비너 슈니첼 Wiener Schnitzel.”

“또? 질리지도 않아?”

“전혀. 여기 슈니첼 Schnitzel 은 항상 맛있어. 신선한 레몬즙을 뿌려 먹으니까 느끼하지도 않고. 그리고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든든한 걸 먹고 싶거든.”

“하긴 루터 운트 베그너 Lutter & Wegner를 유명하게 만든 시그니처 메뉴 Signature Menu 니까.”

“마리는 뭐 먹을 거야?”

“음... 난 연어구이 먹을래. 레몬에이드랑.”

“난 시원한 생맥주!”


주문을 하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눈을 감는다.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에 조심스레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비가 내린 후의 햇살이라 그런지 더욱 따뜻하고 상쾌했다. 한산하던 거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루터 운트 베그너 Lutter & Wegner의 야외테이블은 늦은 점심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손님으로 가득 메워졌다. 


“햇살 정말 좋다.”

“선글라스 가져올 걸.”

“그러게. 이렇게 날이 갤 줄 알았으면 가져오는 건데.”

“베를린의 봄 날씨는 하여간 알아줘야 해.”

“너무 변덕스럽지.” 

“일기예보도 참고만 하는 정도지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다니까.”

“응. 하지만 때로는 일기예보가 맞지 않는 것도 좋잖아.”

“무슨 말이야?”

“우리 결혼식날.”

“아~ 그 날! 날씨 운이 정말 좋았지.”

“겨울에 결혼식 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는데 일기예보에서 눈이나 비까지 온다고 했을 때 얼마나 실망하고 걱정했는데.” 

“그 날은 하늘에서 우릴 축복해 준거야. 아침 내내 흐리고 춥더니 우리 결혼식 직전에 해가 떴잖아. 먹구름을 밀어내고. 거짓말처럼.”

“맞아. 신부화장하고 있을 때까지도 비가 내렸었어. 좋은 날씨는 포기하고 호텔을 나서는데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거야. 정말 꿈만 같았지. 너무 기뻐서 눈물이 쏟아지려는데 간신히 참았어. 눈물에 번진 화장을 하고 결혼식장에 갈 순 없었으니까.”

“난 신부 입장할 때 울뻔했어.”

“왜?”

“성당문이 열리고 네가 입장하는데 뒤에서 눈부신 햇살이 비추는 거야. 그 장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도 햇살이 비추는 날씨는 거의 포기하고 비만 그치길 바랬었거든. 웨딩드레스도 나랑 고른 것 말고 다른 걸 입고 있어서 놀라기도 했고.”

“독일에서는 신랑이 결혼식 하기 전에 신부 웨딩드레스 보는 거 아니야. 그때는 내가 마음이 급해서 우리 쇼핑 나갔을 때 그냥 샀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결혼식 바로 전날 바꿨지.”

“한국이랑 다르네. 한국에서는 신부 드레스, 신랑 수트를 함께 고르는데. 그리고 여기서는 결혼식 전날 신부가 신랑하고 따로 자는 것도 몰랐어. 멀쩡한 우리 집 놔두고 네가 호텔에서 잔다고 했을 때 좀 의아해했지.”

“독일에서는 동거하는 커플도 결혼식 전날은 따로 자는 게 풍습이야. 보통은 신부가 호텔에서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마시며 가벼운 파티를 즐겨. 수다를 떨면서 긴장도 풀고. 다음날 아침 호텔방으로 사람을 부르거나 근처 헤어살롱에서 헤어 스타일링이랑 메이크업을 하면 준비 끝. 신부는 아직 신랑이 보지 못한 드레스를 입고 신부 아빠랑 함께 신랑과 하객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장으로 입장하는 거지. 멋지지 않아?”

“응. 드라마틱했지 그 날 일어난 모든 일이.”

“난 너무 기대되고 즐거웠어. 하루만 자고 나면 결혼식날인데 실감이 나질 않는 거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거야. 내가 다음날 결혼한다는 게.”

“오빠는 총각파티 안 가고 집에 있었다며?”

“어. 그전에 이미 친구들 만나서 먹고 마셨잖아. 물론 친구들이 총각파티를 제대로 해준다고 했을 때 고맙기는 했지만 결혼식 전날이라 부담스럽더라고. 내 생애 가장 멋진 날 혹은 가장 멋져야 할 날에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몸으로 지내는 건 바보 같은 짓이잖아. 더욱이 너도 알다시피 맥주 한두 잔으로 파티를 끝낼 친구들도 아니고.”

“그래. 오빠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는 날이면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 자기가 아직도 20대 초반인 줄 알아. 그리고 술 마시고 나서 회복되려면 며칠이나 걸리잖아.”

“그렇지. 정말 회복 속도가 달라 이제는.”

“하여간 그날은 잘했어. 물론 집에 혼자 있었다니 조금 외롭긴 했겠지만.”

“단순히 외로운 게 아니라 기분이 묘하더라고. 총각으로 보내는 마지막 저녁 집에서 혼자 스테이크 구워서 와인 홀짝이는데 무슨 맛인 줄도 모르겠고. 음악은 뭘 들어도 멜랑콜리하고.”

“그냥 일찍 자지 그랬어?”

“물론 노력은 해봤지. 근데 잠이 안 오는 거야. 누워서 눈을 감고 있어도 이런저런 생각만 눈 앞에 아른거리고. 결국 몇 시간 못 자고 나갔지.” 

“그랬어? 얼굴 좋아 보였는데.”

“당연하지. 아침부터 얼마나 신경 쓰고 나간 건데.”


지난해 겨울 우린 이 곳 젠다멘마크트 Gendarmenmarkt에 자리한 프랑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국제결혼이라 준비할 것도 많았고 마리의 30번째 생일에 일정을 맞추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우린 생애 최고의 날을 보냈다. 청첩장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결혼식 장소부터 점심식사 그리고 저녁 파티에 관한 모든 걸 직접 진행했다. 특히 음식과 와인에 많은 에너지와 비용을 쏟아부었다. 여러 가지 코스 요리를 직접 먹어보고 각각의 코스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는 일은 4달 동안 결혼 준비를 하며 우리가 가장 즐긴 과정이 이었다. 동네 꽃집 아저씨에게 주문한 부케와 테이블 장식, 간결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다크 초콜릿 웨딩케이크, 파티 동안 이어진 라이브 재즈 밴드의 연주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웨딩촬영 역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초대된 하객들은 결혼식과 파티를 맘껏 즐기며 우리의 멋진 ‘웨딩디자인’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 편의 영화 같았던 우리의 결혼식은 많은 돈을 들여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한 소규모 결혼식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디자인한 결혼식과 파티에 맞추기 위해 아직 정해지지 않은 하객 리스트에서 이름을 하나둘씩 지워야 했을 때는 정말 어렵고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비용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하객을 더 초대하기 위해 우리가 디자인한 결혼식의 ‘퀄리티’를 낮출 수는 없었으니까. 나와 마리의 결혼식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우리 둘이 가장 행복하고 즐길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것이었고 우린 그렇게 했다. 한국에서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몽상에 불과하겠지만. 


“잘 먹겠습니다~!”

“구텐 아페티트 Guten Appetit!“

“역시. 슈니첼은 신선한 레몬즙을 뿌려 먹는 비너 슈니첼 Wiener Schnitzel 이 최고야. 우리 결혼식 점심때도 대부분의 하객이 비너 슈니첼을 주문했었잖아. 넌 그때도 연어구이 먹지 않았어?”

“응. 여기 비너 슈니첼이 맛있긴 한데 몇 조각 이상은 못 먹겠어.”

“비너 슈니첼은 송아지 고기라서 돼지고기 슈니첼보다는 기름기도 적고 깊은 풍미가 있는데...”

“느끼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많이는 못 먹겠어. 차라리 서울에서 먹었던 일본식 슈니첼(돈카츠)은 다 먹을 수 있겠다.” 

“돈카츠가 훨씬 기름지고 무거운데. 내 생각엔 아무래도 새로운 음식이었으니까 더 많이 먹었던 것 같아. 달콤한 소스가 곁들여져 나오기도 하고.”

“그럴 수도 있지. 하여간 난 웬만해서는 생선이 고기보다 좋아. 특히 연어.”

“나도 연어 너무 좋아. 특히 신선한 회로 즐기는 연어 뱃살!”

“맞아. 우리 지난번에 라파예트 백화점 lafayette에서 샀던 연어는 스코틀랜드산이라고 했나? 노르웨이산보다 기름이 좀 적고 살색도 진한 것 같던데. 그거 정말 맛있었어.”

“맞아. 스코틀랜드산. 노르웨이산은 말이 많잖아. 몇 년 전에 프랑스에서 크게 터졌던 스캔들 때문에.”

“루터 운트 베그너 Lutter & Wegner는 어디 연어를 사용할까?”

“글쎄. 모르겠지만 걱정 말고 먹어. 어차피 구워서 나온 거고 얼마나 자주 먹는다고. 자, 

식기 전에 우선 먹자!”


우린 결혼식 점심으로 먹었었던 음식을 즐기며 다시 한번 그 날을 추억했다.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아름다웠던 그 날.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쁘고 행복한 시간일수록  빨리 지나가기 마련이다. 반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은 길게만 느껴지고. 억울하긴 하지만 방법은 없다.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거나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우리 저녁은 뭘 먹지?”

“점심 먹고 나자마자 저녁에 뭘 먹을지 생각하는 사람은 오빠밖에 없을 거야.”

“잘 먹고 마시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그렇긴 하지만.”

“우리 오늘 LP 도 2개나 샀잖아. 그거 들으면서 먹을만한 걸로.”

“글쎄. 뭐가 어울릴까? 라파예트 백화점 Galeries Lafayette에 가서 빵 하고 치즈 사가는 건 어때?”

“마리, 역시!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린 자두 하고 호두가 들어간 빵 하고 콩테 치즈 Comté cheese 그리고 우리 결혼식 파티에서 마셨던 레드와인!”

“그래. 어차피 점심 늦게 먹었으니까 저녁은 간단하게 먹자.” 

“응. 결혼 앨범 보면서 먹을까?”

“그러자. 결혼 앨범은 언제 봐도 좋아. 절대로 질리지 않을 거 같아.”

“그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이 어떻게 질리겠어?”


평생 잊을 수 없는 그 날. 그런 날들이 앞으로도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우리는 식장을 나서는 신혼부부처럼 루터 운트 베그너를 나섰다.  

매거진의 이전글 베를린, 화요일 0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