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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Nov 13. 2020

베를린, 수요일 02

Monday to Sunday in Berlin

아직 정오가 채 되지 않은 수요일의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집 근처의 공원 앞에서 M29 버스를 타고 신 국립미술관 Neue Nationalgalerie으로 향한다. 운이 좋게 2층 좌석의 맨 앞자리에 앉아 커다란 차창을 통해 펼쳐지는 베를린의 여유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한 생각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단지 그러한 이유로 오래 걸리더라도 지하철보다는 버스나 트램을 이용하며 가끔씩은 목적지 없는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던 시절, 항상 꿈꾸고 토론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회를 비판하던 그 시절, 나는 프라하 Praha에 빠져있었다. 모든 게 너무나 빠르고 현대적으로 바뀌어가는 서울에 지쳐서였을까? 중세의 풍경을 간직한 동화 같은 도시에서 난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을까? 인턴쉽과 졸업전시회 준비로 바빴던 그때,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여행서적 하나 없이 무작정 프라하에 갔다. 명소에 가봐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은 접어두고 정해진 목적지 없이 무조건 걸었다. 걷다 지치면 빛바랜 빨강과 베이지가 너무나 어울리는 트램을 타고 차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와 이유 없는 우울함을 즐겼다. 난 그저  그게 너무 좋았다. 목적지가 없었기에 눈에 보이는 아무 트램이나 잡아타면 그만이었다. 관광객이나 여행객이 많은 명소를 지날 때도 있었지만 현지인들도 모를 것 같은 외진 곳을 지나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긴장하기도 했다.) 하루는 넋 놓고 앉아 있는데 운전사가 다가와 종착역이니 내려야 한다며 목적지가 어딘지를 물었다. 내릴 곳을 지나친 여행객으로 보였을 것이다. 난 그에게 목적지가 없으니 다시 이 트램을 타고 돌아가도 되냐고 물으며 하루짜리 티켓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러라고 했다.


우리는 별 대화 없이 여유로운 풍경을 즐기며 신 국립미술관에 도착했다. 20세기 초, 현대미술이 전시되어 있는 이 곳은 독일계 미국 건축가인 루트빅 미스 반 더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가 디자인한 바르셀로나 체어 Barcelona Chair 가 박물관 곳곳에 놓여 있어 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베를리너 필하모니커 Berliner Philharmoniker 옆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무제움스인젤 Museumsinsel에 자리한 여러 뮤지엄이나 갤러리와 함께 연중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른 오전 시간에, 오픈 시간에 맞춰가면 비교적 한가한 관람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뿐더러 현지 학생들이 단체 관람을 많이 오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람들이 가장 많을 것 같은 12시에서 2시 사이, 점심시간이 비교적 한산하다. 배가 고픈데 뭔들 눈에 들어오겠는가!  (2019년 9월 현재 문을 닫은 상태로 2015년 1월부터 개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며 2019년 개관 예정이라 했으나...) 


“마리, 어디부터 시작할까, 우선 카페에서 차 한잔 할까?”

“그것도 좋지만 여기 오는 내내 앉아 있었더니 난 좀 걷고 싶은데.”

“그렇네. 우리 계속 앉아 있었지. 그럼... 키어히너 Kirchner (에안스트 루트빅 키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한테 갈까?”

“응. 좋지. 이 곳에 있는 다른 그림들은 아무리 유명한 아티스트의 작품이라도 그다지 끌리지가 않는데 키어히너작품은 볼수록 매력이 있어. 특히 그의 작품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를 보면 뭔가 기괴하고 거칠어서 거부감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하고픈 말이 들린다고나 할까? 기다랗고 뾰족하게 왜곡된 인물과 배경 그리고 음산한 색채에서 키어히너 의 대도시에 대한 냉소가 느껴져.”

“베를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나 보네.”

“그 당시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이주한 키어히너는 혼란스럽고 타락한 도시에 실망을 많이 해서 포츠다머 플라츠를 비롯한 같은 시기의 여러 작품들을 보면 그가 바라보는 베를린이 비관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그래? 화려한 여자들이나 잘 차려입은 남자가 등장하는 그림이 많아서 난 도시의 화려함을 표현한 거라 생각을 했는데...”

“그 여자들은 거리의 여자, 창부들이고 주변의 남자들은 그들을 소비하는 익명의 소비자로 타락한 도시의 단면을 표현한 거지.”


어느새 우린 키어히너의 포츠다머 플라츠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리의 설명을 듣고 나서 바라보는 그의 작품은 불안하고 우울하게 다가왔다. 높이가 2미터나 되는 화폭 왼편을 꽉 채운 두 여인의 눈동자 없는 검은 눈은 섬뜩하기까지 하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얼굴 없는 남자들 역시 기괴해서 음산한 느낌이 풍겼다. 작가의 절규가 잘 느껴지는 그림이라는 마리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기분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아, 설명을 듣고 보니 그림이 다르게 보이네!”

“당연하지. 배경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지. 그림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다 그렇잖아.”

“그렇다고 뮤지엄이나 갤러리 혹은 연주회를 갈 때마다 의무감으로 일종의 공부를 하고 간다면 즐기기 전에 지칠 것 같은데.”

“물론 의무감에 그럴 필요는 없지. 관심이 가는 작품이 있거나 발견하게 되면 자연스레 알고 싶어 지게 되는 거잖아. 나도 이 곳에 있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 키르히너 것을 제외하면 거의 아는 작품이 없어.”

“그렇지. 관심이 있어야 알고 싶어 지지. 학교 다닐 때 책에서 보아왔던, 소위 말하는 명화들을 실제로 봤을 때 감동보다는 실망감이 클 때가 많더라고. 특히 미술학도를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 루브르에서 만난 모나리자는 최고의 실망이었지! 교과서에 나오는 명화라는 것 자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것이니까. 물론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대가들의 작품이 존종받아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지만. 하

여간 그런 작품들보다 오히려 잘 알려진 않거나 우연히 접하게 된 작품에 관심이 가게 되고 자연스레 공부를 하게 되더라고.”

“명화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단하겠지만 그것을 누가 평가할 권리가 있고 평가가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어. 예술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거잖아. 그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테고 표현하는 방식 역시 제각각 일 텐데 어떤 것은 대작으로 불리고 어떤 것은 졸작으로 불리고.”

“그런 면에서 내 생각은 좀 달라. 물론 본질적으로 예술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표현방법은 다르겠지만 뛰어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의 차이는 있다고 봐. 그림을 예로 들면 구성이나 색감 등의 여러 요소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혹은 멋지게 표현되었는가의 차이겠지. 물론 그 아름다움이나 멋짐의 정의조차도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말이야. “

“뛰어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가르는 평가가 많은 작가들을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나는 안타깝고 슬퍼. 키어히너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명성을 얻지 못하고 평가받지 못해서 고통받다가 결국 자살을 하잖아. 물론 약물 중독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야.”

“이 사람도 자살했어?”

“응. 자신의 심장에 총을 쏴서 자살했어. 그것도 두 발이나 쏴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첫 번째 총알이 이미 심장을 관통했을 텐데 어떻게 두 번째 총알을 발사할 수가 있었지?”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세상이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웠기에 자신의 심장에 두 번이나 총알을 박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대화를 멈추고 키어히너의 다른 작품들을 감상했다. 거친 붓 자국 하나 하나마다 그의 비극이 담긴 듯하여 보는 내내 안쓰러운 감정이 떠나질 않았다. 나는 마리를 남겨둔 채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나를 위로라도 하듯 햇살은 기분좋게 내리쬐고 있었고 난 계단에 앉아 지긋이 눈을 감은 채 키어히너의 음산함에 젖은 몸을 말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연스레 몸을 일으켜 미술관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커다란 미술관 유리창에 반사된 주변의 풍경은 내가 신 국립미술관을 좋아하는 이유중의 하나로 이 곳에 모셔져 있는 어떤 명화나 작품보다도 매력적이다. (신 국립미술관은 철골과 커다란 유리로 이루어 진 건축물이다.) 난 이 곳을 수차례 방문했지만 백남준 작가의 작품이 전시장의 출구인 갤러리 카페와 서점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정도외에는 사실 기억에 남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의 작품 역시 인상적이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워낙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 또는 그 작품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적인 특성때문이다. 이 곳에 모셔져 있는 거장들의 작품을 폄하하거나 모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단지 내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키어히너의 작품을 보기위해 이 곳을 찾는 마리처럼.


“여기 있었네!”

“마리, 벌써 나왔어?”

“응. 창 밖으로 햇살이 너무 기분좋게 내리쬐길래 그냥 나왔어. 실내에 있으려니 왠지 손해보는 기분이 들어서.”

“잘했네. 그럼 우리 좀 걸을까?”

“그래, 티어가르텐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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