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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Dec 02. 2020

베를린, 금요일 01

Monday to Sunday in Berlin

금요일은 나처럼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에게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날이다. 요일에 상관없이 언제나 금요일처럼 지낼 수도 있지만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지금 보다도 훨씬 더 젊었던 시절, 프리랜서 생활을 처음 시작한 그 시절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어도 거의 매일 금요일 밤의 열기熱氣를 즐기며 살았었지만...) 월요병이 있을 리 없는 내게도 월요일은 왠지 힘겹고 흥도 나지 않는 반면에 금요일은 아무런 이유 없이 들뜨게 된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는 마리와 주말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기쁨이 가장 크겠지만 미묘하게 느껴지는 금요일만의 향기가 있는 것 같다. 그 향기에 흠뻑 젖기도 전에 돌아오는 월요일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사실 일요일 오후부터 이미 월요일이라 느껴진다.) 이렇게 아쉬움이 남아야 또 기다려지지라고 자위하며 또 다른 금요일을 기다리게 된다. 

금요일을 뜻하는 독일어 ‘프라이탁 Freitag’ 은 많은 유럽권 나라와 마찬가지로 금성金星을 상징하는 신, 프리그 Frigg 혹은 베누스 Venus의 날이란 뜻이지만 내가 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독일어의 형용사 ‘프라이 Frei 자유로운’과 명사 ‘탁 Tag 날’이 만나 ‘자유로운 날’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주일 동안 노동을 마치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로운 날’, 금요일. 실상은 나의 짧은 독어 실력에서 비롯된 오해였지만 어쨌든 나름 멋진 해석 아닌가!


“바비큐 먹으러 가자!”

“아침부터 무슨 바비큐야?”

“모르겠어. 눈을 뜨자마자 너무 먹고 싶은데.”

“마크트할레 노인 Markthalle Neun 가자는 거지?”

“응.”

“거긴 12시에 열잖아. 이제 9시 밖에 안됐는데.”

“그럼 집에서 간단하게 스무디 Smoothie 만들어 먹고 산책하다가 바비큐 먹으러 가자.”

“배고픈 거 못 참으면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

“응. 허기만 살짝 채워야 점심을 더 맛있게 먹지.”

“하여간 스무디 오랜만이네.”

“오랜만은 뭘...”

“언제 마지막으로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 정도로 오래됐나? 앞으로 자주 해줄게.”


  맛있고 건강하게 느껴지는, 말 그대로 건강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얼마나 몸에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스무디를 한 잔에 4-5€ 나 주고 사 먹는 게 아까워서, 더 좋은 재료로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는 괜한 자신감에 두꺼운 유리 재질로 된 고급 블랜더 Blender를 구입했다. 마리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스무디를 만들어 먹겠냐며 말렸지만, 사더라도 아담한 크기의 저가형 모델을 사자고 했지만 난 언제나처럼 수일간의 인터넷 서핑 후에 묵직한 그 고가의 기계를 주방에 들여놓았다. 강력한 모터를 장착한 블렌더는 튼튼한 유리 재질이라 얼음을 넣고 갈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플라스틱 블렌더에 얼음 혹은 냉동과일을 넣고 스무디를 만드는 것을 보면 플라스틱이 갈려 나올 것 같아 찜찜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동안 무쇠도 갈아버릴 것 같은 블렌더만 바라보아도 흐르는 미소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려나? 그렇다. 얼리어댑터까지는 아니지만 난 기계를, 그중에서도 주방가전을 편애하고 많이 사 모은다. 나름 심사숙고해서 구매 결정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방가전은 제 구실을 하고 있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물건들도 있다. 그다지 사용되지 않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그 물건들을 볼 때면 마리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는 듯해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지금까지 주방가전 중 최악의 아이템은 쥬서 Juicer 였다. 검은색과 무광의 은색이 멋지게 어우러진 쥬서는 사과를 자르지 않고도 통째로 넣어 착즙을 할 수 있으며 사용 후 설거지는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거짓말에 가까운 매혹적인 문구가 제품에 부착되어 있지만 실제 사용해 본 결과 200€ 가까이 되는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할 제품은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쥬서는 생일 선물로 받았지만... 물론 구매 초기에는 유기농 사과, 당근 등을 부지런히 사다 나르며 아침마다 열심히 쥬서기를 가동시켰지만 몇 주가 지나자 그 커다란 기계는 주방 한 구석에서 화석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문이 달린 수납공간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중고로 처분하려고 해도 1년 넘게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때, 신선하고 맛있지?”

“맛있네. 바나나, 딸기, 블루베리 그리고?”

“우유랑 소금 조금 넣었어.”

“확실히 파는 것보다 신선하고 맛있는 것 같아.”

“당연하지. 질 좋은 재료만 쓰니까. 재료값 따지면 시중에서 판매하는 유기농 스무디 가격하고 별반 다르지 않아.”

“오늘 아침은 덕분에 가볍고 상쾌하게 시작하네. 산책은 어디로 갈까?”

“스무디 만들면서 잠시 생각해 봤는데 모둘로어 Modulor는 어때?”

“좋다. 여유롭게 책도 보고 가구도 구경하면 되겠네.” 

“응. 슬슬 걸어가서 둘러보고 12시 즈음에 마크트할레노인에 가자.”

“잠깐, 그러고 보니 모둘로어에서 살 게 있었는데. 뭐였더라...”

“필기도구 같은 거 아냐?”

“글쎄.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

“그러게 메모를 해두지.”

“메모하는 것도 깜빡했어.”

“메모도 습관이야. 종이와 펜을 항상 옆에 두지 못하면 스마트폰에라도 메모를 해야지.”

“그래야겠다고 항상 생각은 하는데 잘 안되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면 습관이 아니지. 모둘로어가서 내가 메모지랑 펜 사 줄 테니 천천히, 꾸준히 메모하는 버릇을 들여. 하여간 생각 안나는 거 보면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겠지 뭐. 모둘로어가서 보면 생각날 수도 있고. 너무 신경 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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