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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 Dec 09. 2020

베를린, 금요일 02

Monday to Sunday in Berlin

스무디로 허기를 채우고, 크로이츠베르그 36 Kreuzberg 36 지역 최고의 번화가를 품은 오라니엔슈트라쎄 Oranienstraße를 따라 걸었다. 마약상들이 파리떼처럼 성가시게 구는  괼리처 반호프 역에서 U Bahn Görlitzer Bahnhof 시작되는 이 거리는 매년 5월 1일 노동절이 되면 폭력적인 시위가 되풀이되는 곳으로 악명이 높으며 이스탄불의 어느 번화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터키인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항상 활기를 (내겐 혼돈에 가깝지만...) 띠는 곳이다. 이 곳에서 정착해 살면서 현지 문화는 물론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상당수의 터키 혹은 아랍계 이민자들은 그들보다 소수인 다른 이민자, 아시아계 그리고 아프리카계들을 낮추어 보거나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실에 가까운 편견을 무시할 수 없어 내가 즐겨 가는 지역은 아니지만 나의 견해와는 상관없이 주말 저녁이면 동네 젊은이들은 물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 여행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면 금요일 밤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등장하는 이들이 있다. 술에 취했거나 혹은 그 외의 것에 취해 다른 이들의 흥을 깨고 주변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지독한 버릇을 가진 문제아들이다. 기본적인 매너가 없는 사람들, 인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기는 너무나 피곤하다. 아니, 사실상 상대가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문을 배우지 못해 지식이 얕거나 경험이 부족한 것은 흉이 될 수 없지만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건 커다란 잘못이다. 이 곳에서는 특히 그런 이들이 자주 눈에 띈다. 혈기가 왕성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에야 그런 것들을 보면 참지 못하고 불같이 타올랐지만, 아마 나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서의 시간을 잠시 보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혈기를 다스려야 할 나이가 되었고 내 옆에는 마리도 있으니 (마리와 저녁시간이 넘어 이 지역에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굳이 눈 앞에 아무렇게나 싸질러 놓은 똥을 짓이겨 밟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똥이 내게 다가오거나 튀어도 그저 무심한 척 옆으로 비켜가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나처럼 다혈질인 사람한테는 말처럼 쉽지 않다. 흔히 파인트라 불리는 430g짜리 하겐다즈 솔티드 캐러멜 Häagen-Dazs salted caramel을 1회 권장량인 87g 만 먹고 손에서 내려놓는 만큼의 절제력과 용기가 필요하다면 쉽게 이해가 가려나? 그나저나 하겐다즈는 나름 똘똘한 양키가 덴마크식으로 이름을 지어서 많은 소비자들이 낙농업 국가로 유명한 덴마크의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줄 혼동한다. 나만 그랬나? 


오라니엔슈트라쎄의 번잡한 지역을 지나 모리츠플라츠 Moritzplatz에 위치한 모둘로어에 도착했다. 거대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은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 이 건물을 마주했을 때에는 거대한 건축사무소 내지는 갤러리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는 거대한 화방 내지는 문구점이랄까? 인쇄소, 목공소, 디자이너 브랜드 가구점, 서점, 카페까지 입점해 있으니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38,000 개 이상의 제품을 취급하는 이 곳은 모둘로어 Modulor라고 불린다. 건축, 디자인, 미술 등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관련업 종사자들에게는 그 어떤 백화점이나 쇼핑몰보다 매력적인 곳으로 지하에는 베를린에서 정말 찾기 힘든 (아마 이 곳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무료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는데 깨끗하기까지 하다! 물론 벽은 이미 낙서로 도배가 되어 있지만.


“어디부터 구경할까?”

“미니뭄 Minimum (모둘로어에 입점해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 가구점)에 가서 가구부터 보는 건 어때?”

“그러자. 내려오면서 문구랑 화구도 둘러보고 마지막에 서점에 가면 되겠네.”

“그게 좋겠다. 서점 가기 전에 카페에서 차 한잔 해도 좋고.”

“여기 카페에 녹차도 있나?”

“전에 여기서 녹차 마신 기억이 있어. 물론 우리가 집에서 즐기는 녹차와는 거리가 멀지만.”

“싸구려 티백 녹차구나.”

“응. 그랬던 것 같아.”

“그래도 일단 녹차라면 비싸게 받잖아.”

“맞아, 커피보다 훨씬 비싸지.”

“그러면 차라리 레모네이드나 다른 걸 마시는 게 낫겠다.”

“그러자.” 


1층(한국의 2층에 해당)에 위치한 미니뭄 Minimum부터 둘러보기 시작한다. 대부분 고가의 디자이너 브랜드 가구를 취급하는 이 곳에서 우리는 가구를 보고 만지고 느끼고 배우고 꿈꾼다. 빈티지 가구들로 더 이상 공간이 넉넉지 않은 우리 집에는 들여놓을 수 없지만 언젠가 새로운 공간이 생긴다면 어떤 가구에 어떤 조명을 어떻게 배치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이 곳에 오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미니뭄을 나설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가격이 나가는 물건은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형차 한 대 값과 맞먹는 소파는 대를 물려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만듦새가 뛰어나며 시간이 흘러도 멋진 자태를 유지한다. 싫증이 나서 팔게 되더라도 섭섭하지 않은 가격에 중고로 거래할 수 있으며 한정 생산된 제품이나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는 제품의 경우에는 내가 지불한 금액보다 더 높은 가격에 팔 수도 있다. 나의 첫 빈티지 조명 컬렉션이자 바우하우스 디자인 조명으로 널리 알려진 카이져 이델 Kaiser Idell 은 바우하우스 금속공예 워크숍을 진행하던 크리스티안 델 Christian Dell에  의해 1930년대에 디자인되어 생산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같은 모델이 생산되고 있다. 간결하고 아름다운 디자인과 군더더기 없이 튼튼하게 만들어진 이 조명은 디자인과 장인정신의 조화가 얼마나 긴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렴한 가격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디자인 (대부분이 널리 알려진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의 디자인을 모방한 제품들이지만...)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케아 IKEA는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물론 디자이너 브랜드, 이케아 모두 장단점이 있고 선택은 소비자 각자의 몫이다. 


베를린에서 나의 첫 집을 구하자마자 한 일은 이케아 쇼핑이었다. 당시 나는 빈티지 디자이너 가구나 조명 혹은 디자이너 브랜드의 제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작더라도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곳을 편하게 꾸미는 일이 우선이었다. 물론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으로 지출할 수 있는 금액이 지극히 한정적이어서 이케아나 동네 중고가구점에서 파는 싸구려 제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6개월 정도가 지나자 하나둘씩 장만하기 시작한 이케아 가구와 조명으로 집의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2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이케아 가구의 조립과 분해를  반복하면서 느낀 것은 만듦새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다. 싸서 부담이 없고 언제든 구매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며 오래도록 쓸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뒤로 이케아 가구를 처분하고 50-60년대의 건축가 혹은 가구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최소 50년 이상 된 제품들의 만듦새가 어찌나 그리 견고한지! 시대를 초월한 그 디자인은 또 얼마나 멋진지! 가격이 가격인지라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 꼭 필요한 가구만을 구입하는 효과는 덤이다.   


미니뭄에서 발행하는 잡지 한 권을 챙겨서 서점으로 내려왔다. 작은 규모의 서점이지만 디자인, 예술서적을 주로 하여 아이들의 책까지 제법 구색은 갖춰져 있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앉을 곳이 있다는 점이다. 딱딱한 목재로 만들어진 선반에 가까운 형태의 좌석이지만 잠시 책장을 펼치거나 지친 다리를 쉬게 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언제나처럼 건축, 인테리어, 가구 등을 다룬 책을 뒤적이고 있으려니 카페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에 허기가 몰려왔다. 


“스무디로 아침을 때웠더니 벌써 배가 고프네.”

“그럴 줄 알았어. 카페에서 간단하게 요기할까?”

“그럴까...? 아냐, 그 정도로 배가 고프진 않은데 버터 향기가 너무 좋다.”

“오빠, 배고픈 것 같은데. 거의 12시네. 이제 슬슬 가면 되겠다.”

“그래? 그럼 출발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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