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다시 내게로 왔다
중학교 3학년 무렵의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근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였다. 여주인공의 편견과 남자주인공의 오만이 서로의 사랑을 어찌 그리 꼬이게 만드는지 읽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행복한 결말을 마주했을 때는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때의 희열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숨도 잘 수 없었지만 나는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하루 종일 읽은 이야기를 되새기며 설렜다.
그 이후, 애석하게도 그런 감정이 느껴질 만한 책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한두 권 읽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다지 기억에 남지도 감정이 일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토익이나 자격증처럼 당장 도움이 되는 책들을 읽었다. 그런 것들은 마치 내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았다. 거부감이 들어도 의무감으로 읽어냈다. 그렇게 책에서 멀어지는 것도 모르고 눈앞에 놓인 것들만 보고 살았다. 그것이 어른의 삶이라 생각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자식을 잘 키우려는 마음에 임신 초기부터 각종 육아 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목욕물 온도부터 예방접종 시기 같은 자잘한 정보를 숙지하고 개월 수에 맞는 발달 과정을 열심히 공부했다. 아이의 반응과 자극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게 나에게 있어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다.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뒤돌아보니 나름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았지만, 사용 설명서를 숙지하는 신입사원의 느낌이었다.
어느덧 아이도 자라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던 즈음이었다. 엄마 욕심에 집에서 공부시키기 시작했다. 7살 안팎인 아이의 교육이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인생 첫 학습은 낯설었고 항상 맞춰주던 엄마가 갑자기 엄하게 대하니 시작 전부터 힘들어했다. 자기 의견이나 감정도 생기며 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그제야 나는 내 아이가 육아서대로 크지 않고, 나 또한 육아서처럼 아이를 완벽하게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지 점점 확신이 없어졌다. 남편과의 소통도 적어지면서 나는 심리적으로 꽤 위축됐다. 동네 엄마들이나 아이의 선생님처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버거워졌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던 언니에게 그런 심정을 이야기하곤 했다. 책을 좋아하는 언니는 어느 날 나에게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을 권해주었다. 자주 들어본, 오래된 책이라 크게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니의 말이기에 도서관에서 한번 빌려보기로 했다.
이야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로 시작됐다. 세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부모가 계신 대가족 울타리에서 시골 생활을 누렸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서울에 올라왔다. 가난한 산동네 생활이 시작됐다. 그런데 글을 점점 읽어갈수록 아이의 입장보다 어머니의 마음을 더 헤아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산꼭대기 셋방에서 남편 없이 억척스레 살림했는데 그러면서도 아들과 딸의 교육에는 뜻을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보였다. 존경심이 절로 생겼다. 나 또한 이사와 아이 학교 문제로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엄마의 고민은 시대가 바뀌어도 다를 게 없다고 느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내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위로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후로 언니는 몇몇 책들을 권해 주었고 나는 시간이 날 때 빌려 읽기 시작했다.
* 이 글은 2023년 성북구 평생학습 동아리 지원사업을 받은 '엄마의 글쓰기' 모임에 저자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해당 글을 오디오 북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