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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파 Apr 26. 2024

아이에게 편지

 12월 11일. 내가 가장 아끼는 수첩 한 장을 뜯었다. 그리곤 뜯어낸 수첩 종이를 손편지로 적어냈다. 그날은 처음으로 우리 아이 얼굴을 봤던 날이었다.



오늘은 211211일이란다.

꼬비야, 오늘의 아빠는 29세란다.

아직 얼굴에서 청년의 모습이 남아있는 나이란다.

네가 이 글을 읽는 순간들은 너의 인생에 어떤 순간이니?

그 순간들에도 아빠의 얼굴엔 낙엽으로써라도 청년의 모습이 남아있었으면 좋겠구나.

숫자로는 노년의 시기지만 청년의 낙엽들이 쌓여있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다.

아빠는 의미 있는 청년기를 잘 보낸 것 같은데 꼬비는 어떠니?

부족한 아빠지만 너의 청년기에 좋은 양분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으면 좋겠다.

1211일은 영상으로 너를 처음 만난 날이라 이렇게 글을 남긴다.     


     

아내는 냉장고 옆에 자석으로 이 편지를 붙여 놓았다. 남들이 보기에 조금 부끄러울 수도 있겠으나, 굳이 떼어내진 않았다. 편지를 쓰다 보니 겨우 한 장이지만 큰 진심이 담겼고, 한 장에다 마음을 채우려니 단어가 고상해졌다. 아이가 앞으로 자랄 만큼 자라서 이 편지의 글쓴이와 비슷한 나이가 될 때까지 잘 보관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들에 나뿐만 아니라 아이도 한 번씩 읽어줬으면 좋겠다. 물론 이미 나는 새벽에 아이를 안고 재우면서 최소 8번 이상은 읽은 듯하다.     


 내가 초등학교 때였다. 독후감 숙제를 위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었다. 책 표지에는 당시 MBC에서 하던 '책책책'이란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는 소개 띠지가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누가 산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저 띠지가 영향을 분명 줬을 것 같다. 나는 그 책을 초등학생 때, 중학생 때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쯤에 한 번. 이렇게 세 번을 읽었다. 내가 여러 번 읽은 책은 아마 무협지, 소설책 등을 합쳐서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나에겐 나름 특별한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우리 집 2층 화장실이었다. 나는 변기에 앉아서 읽다가 울었다. 무슨 부분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제가 벨트로 맞던 장면이었는지, 포르투가가 떠났던 순간이었는지. 하지만 그 기억 때문에 후에 2번을 더 읽었던 것 같다. 읽을 때마다 만족했던 것 같지만, 마지막에 읽었을 때의 감상평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만족도는 점점 희석된 듯하다.     


내가 써준 저 첫 편지가 내 아이에게는 반대로 파도치면 좋겠다. 처음으로 저 편지를 언제 읽었는지만,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만 기억만 해줘도 충분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편지를 읽었을 땐 적어도 편지의 진심이 장벽 없이 잘 전달되면 최상일 것이다. 첫걸음을 떼는, 아니 첫 옹알이를 웅얼거리는 아빠의 순수했던 마음이, 듬직한 아빠로 서 있을 우리 아들에게 말이다.     


이와 동시에 나도 종종 저 편지를 읽었으면 좋겠다. 최근엔 냉장고에는 항상 붙어 있었지만 종종 잊고 있다가 아이를 안고 집 안을 서성거리다 보면 마주치곤 한다. 내가 쓴 편지와 같이 나는 내가 나의 아이에게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다. 나의 어버이처럼 말이다.     


 나에게 부모님을 왜 존경하냐고, 어떤 일화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거창한 사연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마음의 증거는 있다. 좋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에서 때로는 흔들려도 탈선하지 않고 지금까지 온 것이 하나의 증거다. 나는 아버지만큼 근면, 성실하진 못하다. 그래도 좌표계에 한 점을 찍어본다면 근면, 성실한 축에 가까운 좌표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머니만큼 자애롭지 못하다. 그래도 스스로 판단하기엔 어머니 덕에 자애로운 사람을 방향하며 살고 싶다. 그들 또한 젊은 시절엔 불 같기도, 물 같기도 때론 밍밍하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런 점이 나의 마지막 뿌리일 것이다.     


 아버지는 신혼 초에 건설근로자로 중동에 가셨었다. 어머니는 큰누나를 낳고, 이제 겨우 20대 초반을, 아버지는 20대 후반을 보내셨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두 분이 주고받았던 편지 중 일부를 어느 명절에 읽은 적이 있었다.      


당시의 우리 집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아니 어려웠던 편이셨다. 아버지의 임금이 해외에서부터 오다 보니 봉급이 때때로 늦어지기도 했다. 그런 여건 때문에 이웃들에게 생활비를 조금씩 빌리기도 하셨다. 그 와중에 친척분이 자녀 학비를 위해 우리 집에 도움을 요청하셨다. 어머니의 물음에 아버지는 도우라고 하셨다. 그분들은 어려워도 인정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들의 모습은 그때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삶에서 종종 우리 형제들에게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오래된 편지 한 장으로 그분들의 젊은 날의 모습을 단편으로라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내가 아이에게 쓴 나의 첫 편지는 큰 의미를 담고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쓰고 나니 오히려 크게 나에게 와닿았다. 곱씹을수록 저 편지를 쓴 일은 참 다행이다. 물론 매번 읽을 때마다 오늘의 나는 당시의 다짐을 다시 한번 재다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 부모님의 편지만큼 시간이 겹겹이 나의 편지에 쌓이고, 나 또한 우리 아이에게 좋은 삶을 보여 준다면 아마 우리 부모님의 편지들이 나에게 다가온 만큼 아이에게도 좋은 바람으로 불어오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가 아들과 적어도 진심을 담은 편지 한 통 정도는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20대 초. 군대 훈련병 시절이었다. 훈련병들에겐 매주 한 번 여자친구나 친지로부터 편지가 왔었다. 나 또한 편지들을 종종 받았다. 그리고 그중에 한 통이 아버지로부터 왔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희승이에게’로 시작하는 편지 한 통이 말이다.      


아버지는 경상도 분으로 다정한 말보단 행동으로 표현하시는 분이셨다. 나 또한 전형적인 아들이었다. 집에선 별말도 없고 무뚝뚝하지만 밖에선 활발하던 아들. 분명 서로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이임에도 차마 말로는 못하던 부끄럼쟁이 부자. 그런 부자 중에 아버지가 먼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셨다.      


편지를 받은 날은 마침 나의 불침번 순서였다. 훈련병들은 각자 생활관 문 뒤에 서서 야간에 복도를 3시간 정도 감시했다. 보통 자유시간이 넉넉지 않아 다들 이 시간에 문 뒤에서 몰래 편지들을 읽었다. 나도 아버지에 온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읽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희승이에게’. 그날 밤은 복도가 너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춥진 않았는데 콧물이 나왔다. 실내였는데 자꾸 소매가 젖었다.      


나도 아들이 군대에 가면 편지 한 통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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