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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파 May 16. 2024

아빠는 빨간 다라이 속에서 무엇을 발견 했을까

 이제는 작아졌다. 이케아에서 샀던, 당시엔 아이에게 컸던 아기용 욕조. 두 살이 다가오는 우리 아이에게는 이제 몸에 딱 맞다. 그래서 아이에게 부족한 크기가 되었다. 세상에 클수록 좋은 게 몇 없지만 욕조는 클수록 좋을 듯싶다. 물론 일반적인 성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 말이다. 신생아 때는 욕조라 불리는 통 세 개를 사용해서 아이를 씻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 개에서 샤워핸들로, 미끄럼 방지 패드로 점차 아이는 부모의 손으로부터 독립해 나간다. 이런 걸 보면 나 또한 현세대의 부모인가 보다. 무슨 조막만 한 아이 하나 씻기는데 이렇게 많은 통을 쓴다던가, 조금 커서는 ‘샤워 핸들’이라는 신문물로 씻기다니. 부모님 세대가 보기에는 아이 키우기가 참 편하게 보이실 듯하다          


아이를 씻기고, 재우고 그리고 부모님들은 보통 자유시간과 함께 본인이 씻는다. 나 같은 경우는 재우는 단계에서 하루를 마감하기 일쑤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어둡게 만든 방과 틀어놓은 백색 소음에 나 또한 무력한 하나의 피곤한 중생으로 바뀐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씻기는 단계에 같이 씻게 되었다.  아이 옆에서 샤워하는 내 모습. 아이가 욕조에 혼자 잘 앉아 있는 시기가 한참 되었음에도 같이 할 생각도 안 했었다. 하지만 아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다가 아들과 아빠만이 당당히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최근엔 종종 아이를 아기 욕조에 넣어두고 옆에서 후다닥 같이 샤워를 한다. 솔직하자면, 아이임에도 나의 알몸을 보여준다는 게 처음에는 조금 떨떠름했다. 대중목욕탕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이도 처음엔 조금은 신기해하였던 게 생각난다. 본인 말고 누군가의 몸을 처음으로 봤을 텐데 얼마나 신기했을까? 본인 몸조차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적어도 아이가 반신욕이란 말은 몰라도 반신욕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목욕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아이는 언젠가 깨우쳐야 할 것이다. 칫솔질, 머리 감기 같은 기초적인 것들부터

시작해서 여자아이라면 길고 긴 세안법이라던가, 남자아이라면 시큼한 땀냄새가 나지 않도록 목욕용품으로 자주 씻어야 한다던가 하는 것들. 방법과 개념 그리고 습관 등 은근히 복잡할 수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문화적으로, 몸으로 체득하지 않고 글로써 '씻는 법'을 배운다면 아주 머리 아픈 학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장 우선적으론 제대로 된 목욕을 하기 전에 뜨근한 물에 몸을 불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 될 때까지 주로 집에서 목욕을 했다. 당시에는 아직 때를 밀어야 목욕이라는 목욕 문화가 아직 우리 사회에 당연히 있을 때였다. 요즘은 많이 희미해진 것 같다. 집에서 내가 썼던 욕조는 김장할

때만 쓰이는 '빨간 다라이'였다. 그 시절엔 그게 목욕탕을 대체했었다. 뜨거운 물. 말 그대로 정말 뜨거운 물이 가득 받아지면 나는 각종 장난감 로봇들을 거기에 첨가했다. 그리곤 들어가서 어머니가 오실 때까지 놀아야 했다. 첫발을 담그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말 뜨거웠다. 그래서 거미처럼 손과 다리를 벌려 물 위로 매달렸다가 들어가기도 일수였다. 어른과 아이의 온도 체감 능력 차이가 선명했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나라는 사람을 완성시키는 여러 조각들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반신욕을 잘하는 우리 아이를 보면서 그 당시의 물은 얼마나 뜨거웠을지 종종 회상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을 지나면서 대중목욕탕을 다녔다. 동네 친구와도 자주 갔었다. 고향의 '동해 목욕탕'은 내 아지트였다. 학원 가기 싫은 날은 어정쩡한 시간에 목욕탕에 가서 한참을 목욕했다. 그러다가 학원 차를 놓치면 그렇게 그냥 학원 안 가는 날이었다(다행히 스스로 횟수는 잘 조절했던 것 같다). 중학생 때는 조용한 평일에 목욕탕의 온탕 속에서 잠들기를 즐겼다.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오후 세시나 네시쯤 해서, 해가 슬슬 기울어 가는 목욕탕에 조용히 쉬러 갔다. 고향이 강원도라 겨울철에 최소 한 번은 폭설이 왔었는데, 그럴 때면 등교를 늦게 했었다. 그러면 일부러 쌀쌀하게 입고서는 얼른 목욕탕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얼어붙은 몸을 탕에 들어가 녹이고는 등교하곤 했다. 이때 얇게 입어서 몸을 얼렸다가 뜨끈한 물로 녹이는 게 중요한 재미 포인트였다.     


어린 시절 주말에는 아버지와도 가끔 목욕탕을 가곤 했다. 아버지의 휴일은 비정기적이라 가끔 날이 맞으면 같이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의 넓은 등을 애쓰면서 밀어드리고는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고사리 같은 손이었다. 커진 내 손과 왜소해진 아버지의 등. 지금의 등밀이는 몇 번이면 끝날 듯싶다. 그러곤 집에 가는 길에 '진미식당'이라는 중국집에 들려 짜장면이나 짜장밥을 먹고 갔다. 식당 사장님은 요구르트를 항상 주셨는데 가끔 반갑다며 몇 개 더 주시기도 했었다. 실컷 다 먹고는 배가 너무 불러서 집에 가서는 짜증이 났던 기억도 있다. 그 뒤로는 금세 성인이 되었다. 명절에나 고향에 내려갔다. 그럴 땐 때때로 아버지에게 목욕탕을 제안해서 같이 갔었다.           


아버지와 함께 간 목욕탕, 부모님과 함께 간 목욕탕하면 20대 초반에 '일로' 여행 중에 만난 아저씨 한 분이 떠오른다. 본인은 큰 기업에 다니는데 면접관으로 들어가면 꼭 하는 질문이 있다고 했다. 바로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목욕탕에 언제 가봤냐는 질문이었다. 나에게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와 자주 목욕탕에 가라고 하셨다. 나 또한 이미 대화하는 와중에 자주 아버지와 가야겠다고 다짐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반성에 반성해야지.          


 최근 주말에 아내가 아이와 외출하는 날이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생긴 자유시간에 대중목욕탕을 갔었다. 거기서 두 아들과 함께 온 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그 부자는 사우나에 계셨는데 좁은 사우나 특성상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들과 초등학생인 듯한 둘째 아들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사우나에서 할 수 있는 목욕 방법들을 알려주시고 계셨다. 예를 들면 사우나에선 모래시계를 돌려놓고 기다리면 된다는 등의 작은 요소들. 아주 별거 아니지만 누군가 알려줬을 때야 아주 별거 아닌 일이다. 어린 초등학생이 혼자 목욕탕에 가서 누가 올려뒀는지 모르는 모래시계를 돌려본다는 건 상당히 낯선 일이다. 이렇듯 아주 별것 아닌 목욕탕 사용법을 어린 아들에게 알려주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순간이 오겠지. 무뚝뚝할 수도 있는 첫째 아들까지 같이 온 것을 보니 저 아버님은 참으로 다정한 분이실 듯하다. 집에서 게임한다고, 친구들과 놀러 간다고 아빠의 제안을 무시하지 않고 따라온 두 아들과 한 아버지의 모습. 좋다.               


앞으로 몇 년 뒤면 내 차례가 올 것이다. 처음엔 분명 내가 먼저 제안할 것이다. 어린 아들에게 목욕 가자고. 그러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내가  우둑허니 집에 앉아 있을 때 다 큰 아들이 목욕이나 가자 하면 어떤 기분일까? 그때는 적어도 추우면 두툼하게 입고 목욕탕에 갈 것이고, 온탕에 누워서 자다가는 누군가 사고가 난 게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물 받아주신 '빨간 다라이'의 뜨거운 물의 온도를 다시 느껴보고자 열탕에 들어가 볼 것 같긴 하다. 그러고는 집에 가는 길에 짜장밥을 아들에게 사주거나 혹은 아들이 취업했다면 얻어먹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요즘은 요구르트를 안 준다고 한마디 첨가할 확률이 높다. 이렇듯 아이뿐만 아니라 나도 추억을 쌓아가고 싶다. 내가 노년을 맞이했을 때도 대중목욕탕도 같이 노년을 맞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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