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랍 Oct 22. 2023

나의 우주에 조금 더 친절하기

긴 꿈을 꾼 밤이었다. 꿈속의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현실 속 나와 크게 달랐던 점은 첫 직장에서 도망치지 않았고, 사랑하는 일을 하고 지내는 중이라는 부분이었다. 꿈속의 세계에 사는 나는 일은 밀려들었지만, 뿌듯함을 느끼며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실과 전혀 다른 환경이었지만, 나는 너무나 능숙하게 다른 상황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떠들고 웃고 밥을 먹었다. 그렇게 또 다른 나의 일상을 다 보내고 집에 가려는 길이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화기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일어나야지, 너도 이게 현실이 아닌 걸 알잖아.”     


그렇게 난 잠에서 깼고, 섬세하면서도 여운이 긴 꿈을 꾼 자신을 조금은 원망하며 부스스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사실 꿈에서 또 다른 삶을 사는 내가 된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꿈속에서 마주한 또 다른 나는 매번 다른 상황에 놓이곤 한다. 어떤 때는 군인이기도, 어떤 날은 수능을 보는 고3 수험생, 또 다른 꿈에선 누군가와 열렬히 열애 중이기도 했다. 이런 긴 꿈을 꾼 날이면 침대에서 일어나며 어쩌면 지금도 또 다른 세계에 사는 그 무언가가 아닐지 의심해보기도 한다.     


가끔 자기혐오가 가득히 차오르는 날이면, 꿈속에서 마주한 세계 속에서 사는 내가 진짜이고, 한숨지으며 바퀴벌레 같이 느껴지는 내가 조만간 사라질 무언가이길 바라기도 한다. 혹은 과거에 한 선택들을 되짚어보며 가장 최악의 경우들이 모인 결정체가 지금의 내가 아닐지 의심하곤 한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들만 모인 세계라면, 차라리 빨리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감기 기운이 있던 어느 새벽이었다. 감기약을 꺼내먹으며 평소에 청소를 자주 했더라면, 가습기를 빨리 켰더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오래전에 꼭 나중에 보리라 생각만 했던 영화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 영화는 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에블린’은 피곤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서서히 일상에서 지쳐가던 에블린은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남편 ‘웨이먼드’를 만나고, 거대한 사건에 휩쓸린다. 그리고 수많은 선택의 분기점마다 새로운 우주가 있으며, 다양한 우주 속에는 모두 다른 특징을 가진 에블린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에블린은 수많은 우주 속 자신을 마주하며 삶의 분기점에서 다른 선택을 하고 찬란히 빛나는 자신을 마주하기도 하고, 상상도 하지 못한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멀티버스 속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건 속에서 에블린은 항상 나약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남편 웨이먼드의 문제 해결방식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웨이먼드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친절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혼란스러울 때는 모두가 무서워 싸우려 하기에 그때 친절함으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한다. 에블린은 수많은 다른 우주들을 마주하며 친절함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에게 닥친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에블린은 결국 친절함을 바탕으로 당당히 현실을 마주하면서 거대한 문제를 푸는 데 성공한다.    

 

영화를 다 본 뒤 불현듯 생각난 말이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두려워 하루하루가 힘들던 시절에 찾았던 병원에서 들은 말이었다. ‘자신에게 친절해져야 해요’라는 말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상담하다 보면 나에게 가장 못되게 구는 사람은 바로 자신일 때가 많아요. 어쩌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많이 지켜줘야 하는 건 내 자신인데, 모순 같게도 가장 많이 상처를 주고 제일 괴롭히는 것도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환자분은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게 숙제에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의사 선생님이 내게 준 숙제는 아직 시작도 못 한 상태로 놓여 있다. 여전히 나 자신이 미운 날이 많고, 분기점마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하며 현실을 슬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 웨이먼드의 말을 떠올려 보려 한다. 내가 처한 상황이 혼란스럽기에 나는 자신과 싸우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장 필요한 건 친절함이라고 강조하던 웨이먼드의 목소리를 생각해 보려 한다.      


만약 다시 꿈을 꿔 다른 세계에 사는 내가 된다면 혹은 나를 마주한다면, 그 세계의 내게 물어보고 싶다. “너의 우주에서 너는 자신에게 친절하니? 나는 내 우주에서 조금 더 친절해지려 노력 중인데, 잘 안 돼. 친절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더 친절해져 볼게”라고 말이다. 그리고 미련의 한숨이 아니라 다른 우주의 내 소식을 들어 반가워하며 꿈에서 깨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 끝 그리고 기묘한 모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