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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Aug 14. 2023

여름 끝 그리고 기묘한 모임

무더운 여름의 끝을 알리는 입추 새벽이었다. 무더위 속에 겨우 잠든 나의 꿈속에선 작은 모임이 열렸다. 그 모임에는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작은 공통점이라면 그저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뿐이었다. 일터에서 만났던 사람과 우연히 친해졌던 지인, 정말 좋아했던 선배 등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나라는 접점을 빼곤 공통점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다.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나는 짧은 대화를 나누며 웃기도 했고, 오랫동안 궁금했던 이야길 묻기도 했다. 이야기를 마친 나는 접점이 없는 이들을 서로 시켜주기도 하고, 재밌는 농담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최대한 웃긴 이야길 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분은 날 떠나지 않았고, 알 수 없는 슬픈 마음도 들곤 했다.      


그렇게 긴긴 모임이 끝나가기 시작할 때 나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꿈속에서 열린 조금은 어색하고 이상했던 모임은 아마도 다시는 내가 마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일터에서 함께 했던 이는 정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고, 친했던 지인은 이제는 연락처도 알 수 없는 사람이 됐으며 정말 좋아했던 선배에게는 내가 악몽과 같은 존재가 됐다. 이렇게 내 꿈이라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은 나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많이 그리워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을 뜬 내가 마주한 건 익숙한 침대 머리맡 풍경이었다. 그리고 꿈에 나온 이들을 잠깐 원망했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모든 일은 그저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것이기에 원망할 곳도 없다는 생각도 바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떨쳐내는 일로 아침을 보냈다.      


분주한 일상에서도 꿈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짙어져 갔다. 그때 불현듯 내가 사랑했던 영화 ‘인사이드아웃’에서 본 ‘빙봉’이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빙봉’은 주인공인 라일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상상 속의 친구다. 빙봉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헤매는 ‘기쁨이’와 ‘슬픔이’와 만나고, 함께 떨어진 기억의 쓰레기장에서 기쁨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사라진다.     


예전에는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들도 내 기억에서 빙봉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꿈속에서 알 수 없는 모임에 참가한 뒤 내가 두려워했던 건 그 반대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많이 그리워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존재조차 잊히는 그런 사람일까 두려웠던 거였다. 그리고 내가 기억의 쓰레기장에서 수레조차 밀어주지 못한 채 사라질까 무서웠다.     


그러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만 빙봉의 마지막처럼 나를 기억했던 사람이 멀리 원하는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일만 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나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뒤에서 밀어주었기에 서서히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 혼자의 힘으로 지금 사는 자리에 도착한 게 아님을 기억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계절의 문턱을 넘어서는 입추에 내 꿈속에서 열린 알 수 없는 모임은 여름이 이제 끝났으니 그만 지쳐있고, 이제는 가을로 나아가라는 말을 해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기억 속의 사람들은 여름의 더위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서서히 지쳐가던 나를 밀어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게 아니었을까.      


기묘했던 모임에 모였던 이들에게 꿈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언젠가는 전하고 싶다. 나는 덕분에 멀리 나아가고 있으니 부디 내가 밀어준 수레를 타고 원하는 곳에 도착해 잘 지내고 있기를. 언젠가 기억의 한 구석에서 만난다면 그땐 가볍게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가길 바란다는 말을 홀로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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