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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랍 Oct 21. 2024

함께 절벽에서 손잡고 떨어지는 일

아이유 'Love wins all'과 장진의 '아는 여자'

“그 이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오래된 동화에서부터 경쾌한 로맨스 영화까지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대부분 앞으로도 이들은 행복할 거라는 말을 남기고 끝난다. 학생일 때는 그저 그들의 행복이 영원하길 바랐지만, 생업에 종사하며 일상을 버텨야 하는 처지가 된 뒤에는 이 결말을 의심하곤 했다. 사랑을 방해하는 악당을 물리치고, 엄청난 사건을 해결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들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사랑이 영원히 행복을 주진 않잖아? 괜찮겠어?” 같은 물음을 행복하게 웃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던져보곤 했다.   

  

밀려드는 공과금부터 오르는 물가에 나날이 팍팍해지는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어릴 적 같이 드라마를 보던 부모님의 말씀처럼 “사랑이 밥 먹여주진 않아.”와 같은 말이 정답일 수 있다고 혼자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라고 답하곤 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야구선수인 남자 주인공과 알 수 없는 아는 여자가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담긴 영화다.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로 꼽았던 건 영화 속에 잔잔히 깔리는 유머들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낭만적이었던 결말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시한부 선고가 사실은 잘못된 일이었다는 걸 안 남자가 여자 주인공에게 달려가 이름을 묻고, 사랑을 확인하며 끝난다. 낭만적일 수 있는 그림 뒤엔 조금은 골치 아픈 일들이 잔뜩 있다. 남자 주인공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으며, 소속팀에서는 잘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건데 뭐 어쩌라고.”라는 마음가짐이 이런저런 사고를 쳐놓은 거다.      


처음엔 이 결말이 그냥 우스꽝스러웠지만, 가끔 꺼내 볼 때마다 이들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남자 주인공은 이제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 없는 수준이 아니고 마이너스인 상태다. 앞으로 어떻게 저 사람의 삶이 흘러갈지 알 수 없는데, 저들은 왜 웃는지 답답하다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마음속에 대책 없는 사랑에 대한 불신이 자라날 때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을 만났다.       


처음 이 노래를 듣고, 나는 수없이 이 노래를 반복해서 재생하고 또 재생했다. 그리고 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건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고, 그렇게 이 노래를 처음 들은지 두 계절 뒤에야 질문에 조금은 부족한 답을 할 수 있었다.     


‘Love wins all’속 화자는 같이 빛나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이 저물어주지 않겠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쁜 결말일지라도 같이 있지 않겠냐고 묻는다. 이 질문이었다. 내가 이 노래를 듣고 끝없이 울컥하며 눈물을 흘렸던 이유 말이다.      


사랑은 밥 먹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랑이 중요한 거였다. 팍팍한 삶에 휘둘리며 사랑을 잊으면 일상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린다. 그렇게 무채색에 익숙해지면, 아름다운 걸 보아도 이를 비웃고 신 포도라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내가 ‘Love wins all’을 들으며 울었던 건 무채색으로 물들어 가는 생활 속에서 비웃을 수 없는 무지갯빛을 봤기 때문이었다.      


무채색 일상에서 가끔 끝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때마다 “세상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거라지만, 너무나 외로운 거 아닌가?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구나”와 같은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다가도 “절벽에 있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들여”라고 자문자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에 절여져 있을 때 함께 떨어지고, 저물어가는 게 사랑이라는 말이 들리니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의 결말이 그냥 둘러대는 말이 아니라는 걸 'Love wins all'은 증명했다. 영화 '아는 여자'의 남자 주인공이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알았을 때 왜 여자 주인공에게 달려갔는지도 설명해주었고 말이다.

      

가끔 자조적으로 “저는 항상 절벽에 매달린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요”라고 말하곤 한다. 그때마다 함께 있어 주겠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내가 먼저 언제라도 함께 절벽에서 손잡고 떨어지겠다고 해줄 수 있다면 무채색 일상이 아주 조금은 색을 입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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