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보라매공원에는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기 위해 모이는 ‘장기원’이 있다. 장기원 천장에는 엄숙한 느낌을 주는 네 글자, ‘훈수 금지’가 쓰인 종이가 붙어있다. 장기원의 한쪽 벽에 ‘자기가 쓴 물건 제자리에 두기’, ‘전기 장비 건드리지 말기’ 등의 이용 규칙이 붙어있지만, 유독 훈수 금지가 쓰인 종이만 따로 장기원 천장 한 가운데에 붙어있어 이곳에선 절대로 훈수를 두어선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왜 훈수가 그렇게까지 금기시되는 일인지 궁금해졌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훈수는 장기나 바둑에서 옆에서 관전하던 사람이 수를 두는 사람에게 더 좋은 수를 알려주는 행위다. 그렇다면 훈수는 본질적으로 충고와 같은 행동이 아닌가 싶지만, 타인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은 환영받아도 훈수를 자주 하는 훈수꾼은 배척 대상 1순위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렇게 장기원에서 ‘훈수 금지’ 원칙을 본 이후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내가 남에게 했던 말들이 훈수였는지, 충고였는지 구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훈수와 충고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무심결에 틀었던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화 어바웃 타임은 시간 여행을 하는 주인공의 삶과 가족, 로맨스를 담았다. 우연히 다시 본 어바웃 타임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남자주인공 ‘팀’과 그의 동생인 ‘킷캣’의 이야기였다.
킷캣이 나쁜 남자를 만나 다툰 뒤 음주 운전을 하다 중상을 입자, 팀은 킷캣이 나쁜 남자를 만나지 못하도록 함께 시간 여행을 한다. 시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팀은 킷캣의 삶의 궤적을 바꿨지만,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도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이에 팀은 시간 여행으로 문제 풀기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으로 킷캣의 삶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돕는다. 팀이 킷캣의 삶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간단했다. 그저 킷캣을 잘 돌보고 잘 먹이며 기다렸다. 그 결과 킷캣은 서서히 몸을 추스른 뒤 무너져가던 삶을 다시 바로 잡는다.
팀과 킷캣의 이야기를 통해 충고와 훈수의 차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듣는 사람에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알려주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의 차이였다. 팀이 킷캣을 가만히 바라보았던 이유는 킷캣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즉 새로운 길을 찾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하는 말은 훈수이지만, 길을 찾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건네는 말은 충고가 될 수 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수많은 말들도 돌이켜보면 충고인척하는 훈수와 훈수처럼 보였던 충고는 달랐다. “그때 그랬어야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결과론적인 말들은 대부분이 훈수였고, “더 나아지려면 이런 길도 고민해 봐”라는 취지의 말들은 대부분 충고였다. 충고와 훈수는 부엉이와 올빼미처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그 무언가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주 훈수를 쏟아내며 왜 상대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느냐며 화를 내곤 했다.
내가 들었던 말들을 되짚은 뒤, 이번엔 내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 하나씩 분리해보았다. 나 또한 비슷했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라고 생각해 전했던 말들은 오히려 상대방과의 관계를 무너뜨린 훈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훈수가 아닐지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건넨 말들은 오히려 고마운 충고였다고 호평을 듣곤 했다. 훈수가 아닌 충고를 뱉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훈수를 두었던 순간들은, 다른 사람의 세계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은 채 나만의 세계의 규칙을 폭력적으로 들이대던 때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만의 세계가 단단하게 완성됐다고 느꼈던 시기일수록 더 자주 훈수를 두곤 했다. 오히려 높게 쌓인 나만의 세계의 방벽을 부수고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할 때, 상대에게 필요한 충고가 나오곤 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왜 장기원 천장에 ‘훈수 금지’가 붙어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장기판에 말을 옮기는 사람은 자신만의 길을 찾고, 답을 낼 준비가 된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섣불리 더 좋은 길을 알려주겠다며 훈수를 두면, 답을 찾아가던 사람을 방황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한마디 하고 싶어질 때마다 장기원 천장에 붙어있던 네 글자를 떠올리기로 했다. 명심하자, 훈.수.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