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모르면 손해인 빈 병 보증금 제도 ‘판트(pfand)’
환경에도 전공이 있다. 거리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을 전공한 이도 있고, 재활용에 능한 자도 있다. '새활용'이라고도 불리는 ‘업사이클링’ 선수도 있고, 다시 사용한다는 의미인 재사용이 전공인 사람도 있다. 국가로 대입해 보자면 독일의 전공은 단연 재활용이다. 재활용도 그저 그런 수준이 아닌 '선수급'!
"독일에선 돈 되는 캔을 찌그러뜨리거나 페트병 라벨을 떼서는 안 돼"
독일에 첫 발을 떼고 모든 게 낯설었던 그때, 현지인이 들려줬던 말이다. 입독 초기, 플라스틱 병이 잔뜩 담긴 에코백을 양손 가득 들고 마트로 향하는 독일인 모습에 갸우뚱했는데 그제야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렸다.
독일에 거주한다면 누구나 한다는 빈 병 보증금 환급 제도 '판트(Pfand)' 때문이었다. 독일어로 보증금이라는 뜻인 '판트'는 빈 병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돌려주고 병을 재활용하거나 재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독일에서는 페트(PET) 병에 담긴 생수나 음료를 사면 제품 진열대에 적힌 가격표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 한다. 페트병 당 우리 돈 350원가량의 보증금이 붙어서다.
평소 생수를 페트병으로 사다 마시는 우리 집 역시 이
주에 한 번 판트를 한다. 우리 집 판트 담당은 남편. 주기적으로 맥주 한 짝씩 사다 나르는 장본인이니까. 판트 귀차니즘에 빠진 나에겐 오히려 잘된 일인가. 에코백에 생수 페트병이 수북이 쌓이고 20개의 빈 맥주병이 맥주 박스 안에 가득 채워지면 남편은 이들을 이고 지고 마트로 간다.
독일 마트 한켠엔 빈 페트병을 들고 공병수거기(Leergutautomat) 앞에 줄 서는 광경이 흔하다. 본인이 사용한 페트병 등을 반납한 뒤 용돈처럼 보증금을 돌려받으려는 아이들은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라.
판트의 특징은 반환이 무척 편리하다는 점이다. 먼저 공병수거기에 병을 넣으면 기계 속 장치가 병에 붙은 라벨을 인식한다. 애초에 현지인이 말한 병 라벨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였다. 라벨이 부착된 온전한 병만 기계에 오류 없이 통과할 수 있어서다. 이후 얼마를 돌려받을지 금액이 공병수거기 화면에 뜬다. 보통 캔과 페트병은 개당 0.25유로(약 370원)씩, 유리병은 종류에 따라 0.15유로(약 220원)나 0.08유로(약 110원)씩 모인다. 모르면 손해다.
장을 본 뒤 기기에서 나온 판트 금액이 찍힌 영수증(Leergutbon)을 계산대(Kasse)에 내면 그만큼 차감해 준다. 원하면 현금으로도 돌려받을 수 있다.
2003년부터 시행된 독일의 빈 병 회수 제도인 판트는 어느덧 21년이 지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덕분에 독일의 플라스틱과 유리병 재활용률은 약 97%에 달한다.
판트는 독일 마트에서만 국한된 건 아니다. 연말마다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주요 관광지에서도 기본이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와인을 주문하면 컵 보증금 2.5유로(약 3600원)가 함께 붙는다(2022년 기준). 사람들은 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컵을 반납한다. 경제적 효과가 클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관광지에서 여행자들이 무심코 버린 페트병 등 재활용품을 가져가 환급하는 '판트족'도 등장했다. 판트는 쓰레기를 버리고, 줄이는 것 외에도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한다. 일단 반환하면 보증금을 돌려주기에, 거리 쓰레기통 근처엔 온전한 빈 병과 깡통이 놓여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병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지 않도록 배려한 조치다. 독일에선 노숙인에게 돈을 건네주는 대신 공병을 주면서 판트로 기부하는 모습도 종종 목격된다니 역시 '재활용 선수급' 나라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