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면허에서 자칭 택시 기사가 되기까지
"속도 무제한인 아우토반에서 운전해야 한다고?"
한국에서 장롱면허였던 난 독일로 건너와서 운전대를 잡아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다. 운전을 해야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어서였다.
독일에서도 한국처럼 아이를 집 근처 기관에 맡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큰 착각. 아뿔싸, 독일은 한국보다 출생률이 높았지. 특히 우리 동네는 아이 둘 집은 기본, 애 셋을 키우는 워킹맘도 흔하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나 유치원에서 연락 온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터. 당시 27개월 큰 아이를 유일하게 받아준 곳은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위치한 한인 어린이집이었다.
우리 집에서 이곳 어린이집까지 차 내비게이션을 켜면 보통 두 개의 루트가 뜬다. 속도 무제한 구간으로 유명한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을 이용하면 17km, 마을 길을 거치면 9.3km다. 이렇게 거리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소요 시간은 내비게이션에서 둘 다 20분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주말에만 운전석에 앉다가 독일어 하나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 운전해야 하니 괜히 겁부터 났다. 여긴 한국어가 안 통하는 독일이란 말이야. 독어 교통 표지판도 뭐가 뭔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아우토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에서 어떻게 달릴지.. 경험치가 없으니 그저 두려움만 엄습했다. 차 뒷자리에 첫째 아이와 당시 11개월 둘째까지 태우고 낯선 타국의 고속도로를 달린다는 건 인생에 없던 선택지였다.
처음엔 마을 길로만 다니는 운전을 택했다. 속도를 크게 내지 않아도 되는 마을 길 위의 운전은 편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답답함이 몰려왔다. 신호등도 많고, 속도제한 30 구간이 곳곳에 존재하는 마을 길. 특히 독일 도로 특성상 자동차와 나란히 다니는 자전거도 늘 신경 쓰이는 요소였다. 이럴 바엔 ’신호등 없는 아우토반을 한번 타보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속 작은 스위치가 켜졌다.
운전에 자신감이 붙으니 '아우토반 별거 있겠어, 한번 가보는 거지 뭐' 하며 애써 쿨하게 말했으나 쿵쾅대는 심장소리는 커져만 갔다.
아이 어린이집 가지 않는 주말마다 남편을 조수석에 태우고 아우토반으로 향했다. 아우토반을 타기 전까지만 해도 무제한 속도란 말에 지레 겁을 먹었다. 특히 아우토반 진입로에 들어가려는 순간 긴장도가 피크를 찍는데 좌측 깜빡이를 켜면 3차로로 달리던 차들도 알아서 1,2차로로 피한다. 아우토반 운전이 생각보다 두려울 게 없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결국 경험치가 쌓이면 뭐든 할 수 있단 얘기가 이런 걸까. 아우토반 위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로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실 아우토반도 모든 구간에서 속도 무제한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아우토반의 70% 구간에서만 속도 제한이 없다.
도로 위 무법자들만 있을 것 같은 아우토반에도 나름 규칙이 있다. 추월 차선인 1차선을 달릴 땐 뒤에 속도를 내며 바싹 붙어오는 차가 있으면 지나가도록 비켜줘야 한다. 독일 정부는 속도가 없는 아우토반에서도 최대 시속 130km을 권장하지만 200km까지 쌩 달리는 차도 많기 때문에 항시 주의! 뒤에서 질주해 오는 차들이 무섭다면 처음부터 2, 3차선으로 편하게 달리면 된다. 속도를 크게 내지 않더라도 주변 차량 흐름에 맞춰 내 페이스대로 운전할 수 있다.
아우토반 위 차들은 이러한 규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 속에서 운전하다 보면 딱딱 잘 들어맞는 테트리스 게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이제는 마을 길보다 아우토반으로만 차를 돌린다. 아우토반을 달려야만 숨통이 트이는 엄마가 된 것이다. 아우토반을 타면 사고가 나지 않는 한 길이 막히지 않으니 아이 유치원을 제시간에 딱 맞춰 보낼 수 있다. 결국 나만의 개인 시간이 더 많이 확보되는 셈이다.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나 같은 ‘아달맘(아우토반 달리는 엄마)’들도 입을 모아 말한다. 아우토반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니 택시 기사, 운전병, 우버 기사 등 어떤 수식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고. 그렇게 아달맘들은 아이 유치원이나 학교를 위해 평일 아침마다 아우토반으로 향한다.
아우토반은 독일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오늘도 운전대를 잡고 아우토반 위를 쌩쌩 달리는 차들과 리드미컬하게 함께 달린다.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에 완벽 적응한 날이 오다니. 독일 운전 3년 차,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준 아우토반이 한없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