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때 입시가 다가오니 애매하게 실기 연습을 할 바에 성적을 끌어올리자고 다짐하여 다니던 입시 미술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렇다고 성적이 잘 나온 것도 아니다.
애매한 내신, 애매한 수능 성적으로 대강 맞춰서 미대의 전공 분야를 세심하게 살피지도 않고 그냥 점수에 맞게 애매한 과로 진학하였다.
그렇다, 난 미대생 출신 예술가다. 그림을 '애매하게' 잘 그리고 이런 '애매한' 재능으로 미대도 어찌어찌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도 다니고 외주도 받고 그림책도 내고 미술 선생님도 하였다.
고등학생
다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자면, 성적이라도 더 끌어올려서 미대 말고 다른 길도 생각해 보자라는 마인드로 입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를 그렇게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성적이라도 조금 끌어올리자는 생각으로 아는 선에서 공부하였다. 내신이나 수능 점수가 특출 나게 잘 나오지도 않았고 미술 관련 활동 말고는 다른 활동들은 소홀히 해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미대 외의 전공을 쓰지 못하였다. 그냥 애매한 성적으로 적당히 미술활동보고서를 채워 갈 만한 곳이 미대 밖에 없었다. 남들보다 실기력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그림은 어느 정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잘 그린다고 생각하여 미대를 가서 재능을 더 발휘하자고 다짐하였다.
대학생
OO대학 금속공예과로 입학하였다.
입시 결과에 맞춰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진학하였으니 장신구를 화려하게 만들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건 큰 오산이다. 고등학생 때 배운 입시 미술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작품을 감각 있게 만드는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금속을 잘 다루는 기술력이 필요하다. 난 헤파이스톤스급 장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다른 동기들보다 많이 뒤처졌고 과제도 그냥저냥 마감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대충 작업해서 제출하고 힘든 졸업전시도 꾸역꾸역 끝냈다.
학점도 제대로 안 나와서 학교생활은 잘 해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못할 줄 알았던 졸업도 결국은 했다.
취준생과 직장인
나는 이제 취업준비생이 되었다.
금속공예는 보내주고 망치와 금속에 손도 하나 안 내고 이 쪽 분야로 절대 뒤돌아 보지도 않았다. 졸업 후 해방이 된 마음으로 전공과 무관한 새로운 직무로 돌려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각디자인이다. 휴학생일 때 웬만한 시각디자인 작업은 다 해보았다. 웹디자인, 편집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캐릭터디자인 등 컴퓨터로 디자인을 하는 작업은 즐거웠다. 그러나 전공을 하지 않다 보니 디자인 전공한 친구들만큼 디자인을 특출 나게 잘하는 건 아니다. 정말 디자인도 남들이 보기에 '애매하게' 잘한다. 자간과 크기를 적당히 맞추고 배색도 어우러지게 하여 뛰어난 디자인 감각을 보여야 하는데 매번 수정해 달라고 지적당하기 일 수다. 이래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좋은 회사 위주로 여러 군데 제출해도 서류부터 탈락을 면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그렇게 취업을 포기하려는 찰나 회사 한 군데서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러 간 후 바로 일주일 뒤에 취업을 하였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 포트폴리오를 봐준 회사가 있으니 취업난 속에서 관문을 뚫었다.
내가 간 회사는 캐릭터 디자인 회사였다. 캐릭터 디자인은 그래도 대학생 시절부터 해오던 것이라서 어느 정도 자신은 있으나 그렇다고 눈에 띄는 캐릭터를 만들거나 sns에 만든 캐릭터를 자랑해도 인지도를 쌓은 건 아니었다. 내가 다닌 회사는 캐릭터 이모티콘을 제작하는 회사였는데 특히 캐릭터 동작과 연출을 잘해서 그려내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에 나는 이 부분에 약했다. 매번 이모티콘을 만들 때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반려당하고 수정도 수십 번씩 하는 게 내 업무였다. 2년 동안 일해도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고 느껴 시키는 일만 꾸역꾸역 해내며 버텼던 나는 결국 회사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였다.
퇴사하기 이전에도 몰래 다른 회사에 그동안 해온 포트폴리오 작업물을 제출하였으나 서류는 다 탈락하고 면접 보러 간 한 군데의 큰 회사도 연봉협상에 실패하여 떨어졌다. 그렇게 회사생활은 마무리하였다.
미술 선생님과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퇴사 후 디자인 일은 오랫동안 접었다.
당분간 재취업할 생각도 없었다.
취업을 하더라도 전에 다닌 회사 생활의 패턴이 똑같이 반복될까 봐 그럴 바에는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기로 했다.
"난 디자인 재능의 한계를 느꼈다. 평소에 일러스트 작가로 꾸준히 활동했으니 대학원을 다니면서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취미로 일러스트를 그리자."
사실 미술학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얼마나 잘 그리는지 실력을 보지 않았다. 사실 아동미술을 가르치는데 뛰어나게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 대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잘 가르치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도 가지며 한 명 한 명 잘 케어해야 한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을 하면서 회사를 다닐 때처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다양한 요구를 하거나 고집을 부리거나 정신없을 때는 정말 힘들기도 하지. 그래도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스트레스받고 눈치 매번 보느라 힘들었으니 이 삶이 오히려 더 좋아. 가끔 학부모 민원은 감당해야 하지만... 그런데 미술학원 강사만 평생 하기에는 월급도 너무 적고, 사대보험도 안되는데, 원장을 하지 않는 이상 이 일도 오래 하지 못하네.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재취업을 하거나 새로운 일을 찾을 때가 되었어."
사실 내가 생각했을 때 가르치는 일도 '애매하게' 잘해왔다. 다른 미술 선생님들처럼 아이들을 잘 다루는 편도 아니고 아이들 작품도 퀄리티 있게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성인 취미미술 클래스를 열면 애매한 그림 실력으로 가르칠 수 있을까? 이 고민을 정말 많이 한다.
학원 일을 병행하면서 일러스트 외주 작업과 그림책 삽화 그리기도 같이 병행하였다. 그림 명암 표현이나, 인체 비율 맞춰서 그리기, 그림 구도 잡고 그리기 등 그림 테크닉을 잘 쓰는 편이 아니고 수많은 그림 작가들에 비해 일러스트도 특출 나게 잘 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간간히 클라이언트들이 그림 의뢰를 하면 감사할 따름이다
역량이 아직까지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데다, 특출나게 잘하는 거 하나 없이 애매한 재능들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온 걸까?
비록 잘 하지 못하더라도 잘해 보이게끔 포장해서 그런 걸까? 의문이 든다.
디자인, 그림 그리기, 글쓰기, 가르치기 정말 다 '애매하게' 잘한다.
이러한 애매한 재능들을 종합해서 어떤 분야로 더 개척해 나갈 수 있을지 매일매일 고민한다.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위해.
지금도글쓰기 실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그림 이외에도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에, 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브런치 플랫폼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처럼 분명 애매한 재능들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이 있을 거 같다.
애매하게 잘한다고 해서 결코 못한다라고 볼 수 없다. 정말 특출나게 잘하는 사람은 각 분야별로 상위 1%에 불과하다. 단지 남들보다 내가 더 잘하는 걸 찾으면 된다.
예를 들어 요리를 특출나게 잘하지 못해 식당 가게를 차려 자영업을 하면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어도퇴근 후 가족과 지인들을 위해 요리하는 건 누구보다 잘하며 여러 식재료들에 관심이 많은 데다 본업인 마케팅 일을 잘하면 식품회사에서 브랜드 마케터로써 일을 잘 해낸다. 혹은 축구를 적당히 잘하고, 글을 적당히 잘 쓰면 축구칼럼니스트가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애매한, 아니 잘하는 것들을 고루고루 혼합하여 또 다른 멋진 재능을 발휘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거나 멋진 일들을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