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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Dec 22. 2023

우상의 황혼

Götzen-Dämmerung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초대를 받아 바이로이트 축제에 참여했다. 1874년 바그너는 축제에서 자신의 오페라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발표한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감상하던 니체는 이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10분 정도만에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 음악 속에 담긴 바그너의 메시지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을 비웃으며 훗날 자신이 집필한 글의 제목을 <우상의 황혼>이라 이름 붙이게 된다. 바그너는 어떠한 메시지를 그의 악장 속에 담아내었으며 니체는 어째서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더욱 소망하는 또 다른 형태의 쾌유를 나는 소원한다. 그것은 우상들의 비밀을 캐묻는 것이다. 세계에는 실재들보다 우상들이 많다. 이것이 내가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사악한 눈빛'이고, 또한 나의 '사악한 귀'이다. 여기서 망치를 들고 한번 질문을 던지면, 아마도 부풀어 오른 내장에서 이야기하는 저 윰여하고 공허한 음성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 이 소리는 귀 배후에 귀를 가진 자에게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 늙은 심리학자이며 유혹자인 나는 조용히 있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을 시끄럽게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 역시 -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 어떤 휴식, 태양의 흑점, 어떤 심리학자의 여유로운 도약이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전쟁이 아닐까? 그리고 새로운 우상들이 캐내어지지 않을까? 이 소책자는 거대한 선전포고이다. 여기서 캐내는 우상들은 시대의 우상들이 아니라, 영원한 우상들이다. 이 영원한 우상들은 소리굽쇠와 같은 해머에 의해 건드려질 것이다. -이보다 더 오래되고, 더 설득력 있고, 더 거드름 피우는 우상들은 전혀 없다. 또한 더 공허한 우상들도 없다. 그렇다고 이 우상들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는 사실은 방해받지 않으며, 가장 고상한 우상인 경우,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상의 황혼 p.12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가상을 실재로 여기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기독교내에서 우상숭배는 금지되어 왔다. 어째서일까? 신이 전지전능한 무한자라면, "이것은 신이다."라는 명제는 항상 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명제는 신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을 유한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신의 속성을 알려고 할 때에는 부정의 방식으로, "신은 ~가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신의 유한성을 부정하는 부정신학이 발달하게 된다. 이들에게 우상은 신의 규정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우상은 항상 거짓된 것이고 금지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우상숭배를 금지했던 그들이 자신의 숭배대상이 우상인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그들은 우상을 금지함과 동시에 가장 확고한 우상만을 쫓아온 것이 아닌가? 그 우상을 절대적이며 근원적이라 믿으며 설파해 왔지만, 정작 그들도 그것이 우상인지 실재인지 확인할 능력이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면서 니체는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이러한 것에 질문을 던지면 안 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그의 소리굽쇠와 망치인 것이다.


 니체는 청년시절 바그너를 존경하며 따랐다. 바그너는 북유럽신화의 생기 있는 영웅담을 그의 음악에 담아내었다. 그때 바그너의 음악들은 힘과 활력이 있었다. 니체는 이러한 그의 음악을 존경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니체가 축제에서 목격한 광경은, 자신이 존경했던 바그너가 각국의 왕들과 독일제국을 통일한 빌헬름 1세 앞에서 음악으로 국가주의를 찬양하며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아내어 설파하는 모습이었다. 배신감을 느낀 니체는 이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들은 니체가 말해왔던 것들과 정반대의 것들로 그가 항상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상들이다. 인간을 자신을 잊은 채 망각 속에 헤엄치게 만드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무엇이 우리의 유일한 가르침일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인간에게 인간의 특성들을 부여하지 않는다. 신도, 사회도, 부모도, 조상님들도, 자신조차도 특성들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에, 그의 천성이 이렇고 저렇다는 것에, 그가 이러한 상황들과 환경 아래에 있다는 것에, 그 누구도 책임이 없다. 그의 숙명은 존재했던 것,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 의지,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를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실현될 수 없다. 그의 본질에 어떤 목적을 전가하고 원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우리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발명하였다. 그러나 현실에는 목적이 없다. 인간은 필연적이다. 인간은 한 조각의 숙명이다. 인간은 전체에 귀속되고, 인간은 전체 안에 존재한다. 우리 존재에게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고, 우리 존재를 측량하고, 비교하고, 유죄판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는 전체에게 올바른 방향을 부여하고, 전체를 측량하고, 비교하고, 유죄판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더 이상 책임지게 하지 않는다는 것, 존재양식이 제1원인으로 환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세계는 통일적 의식도 아니고, 통질적 '정신'또한 아니라는 것, 이러한 사실은 우선 위대한 해방이며, 이와 더불어 생성의 무죄가 복원된다. 지금까지 '신' 관념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최대의 적대였다. 우리는 신을 부정하고, 우리는 신 안에 있는 책임성을 부정한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를 구원한다." -우상의 황혼 p.64


 니체가 두들기고자 했던 것은 종교뿐만이 아니었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종교를 포함한 우상을 뒤쫓게 만드는 사상들,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한 의문이었다. 막연하게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선과 악, 이성, 도덕과 같은 것들의 기초에 대한 물음.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거대한 사상들, 아니면 자본 그 자체 그리고 현대의 성공신화와 같은 것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도 니체에게는 우상일 것이다. 어째서 니체는 이러한 우상들을 문제 삼는가? 이러한 우상들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니체는 설명한다. 영원히 반복되는 생명들의 운동과정에 놓여있다는 부담감, 강자와 약자가 있다는 부담감, 삶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등등 이러한 부담감은 우리의 일상 속에 광범위하게 녹아들어 우리를 압박한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은 고정된 가치들에서 오는 압박이다. 고정된 가치들은 그것이 우주의 법칙인양(자연의 섭리인 것처럼)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하며,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도덕적 문책,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드는 것들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법칙에 순응하는 것을 선, 그에 반하거나 부재한 걸을 악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선의 증대가 곧 역사의 발전이자 진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선이나 고정된 가치들이 우리가 사는 일상 속 삶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인가? 니체는 질문한다. 항상 간접적으로 있는 걸로 간주하는 그러한 가치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망각하고 불완전하고 가치절하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은가? 왜냐하면 그것이 부담스럽고 볼품없고 가치 없다 느껴져 부담스럽기 때문에. 하지만 이러한 행태는 우상을 숭배하며 실재를 격하시키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이 추종한 가치는 태초부터 존속되어 온 고정된 것이 아니며, 항상 유동적이며, 동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러한 것이 아닌가? 현상들을 바라보며 본질을 쫓으려고 하지만, 본질이 선행하여 현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그리고 일상 속에 사는 우리 또한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었던 존재가 아닌가. 우리는 항상 자신을 자신이라 생각하는 새로운 무언가이다. 이러한 새로움을 고정된 가치를 추종하며 발전이라 생각한다면, 끝없는 자기 극복과 발전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 결말은 절망적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옭아맨 가치들의 사슬을 부수고 그것을 놀이처럼 즐긴다면, 자기 극복은 항상 새로운 놀이와 같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러한 놀이에는 지향점이 없다. 지향점 없는 반복 그 자체가 지향점이게 된다. 노화도 실패도 자기 극복의 결과이자 곧 극복의 대상이 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과정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무력하게 한계를 수용하라는 것과는 다르다. 삶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과정, 원동력, 힘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며 항상 변화하려는 주어 없는 무언가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주체는 중요하지 않다. 늘 그래왔듯이 세계에는 과정만이 지속된다. 이러한 것이 니체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기심의 가치는 이를 가진 자의 생리학적 가치만큼 그 가치를 지닌다. 이기심은 매우 가치 있을 수도, 무가치할 수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모든 개인은 그의 삶이 상승일로인가, 하강 일로인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다. 이기심의 가치를 결정하는 표준은 개인의 삶이 상승일로이면 그의 가치는 비범한 것이라는 점이다. 총체적 삶이 더 더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자기 보존을 위한, 최적의 환경들을 창조하기 위한 배려는 극단적이어도 괜찮다. 대중과 철학자들이 지금 까지 이해한 '개별자', 개인은 하나의 오류이다. 그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원자도 아니며, '사슬의 고리'도 아니며, 과거의 단순한 유전도 아니다. 각 개인은 스스로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체적 선(Linie)으로서의 인간이다. 그가 하강의 과정, 쇠퇴, 지속적 퇴화, 병듦을 나타냈다면(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질병들은 몰락의 결과로 드러나는 현상이지, 몰락의 원인은 아니다), 그는 가치가 적다. 그러므로 으뜸가는 정의는 그가 좋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되도록 적게 빼앗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에게 붙어사는 단지 기생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상의 황혼 p.112

 

 뛰어난 자들, 천재들의 중요성을 옹호하며 다소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니체는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은 목적성의 부정이란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뛰어난 자들은 삶 자체를 긍정하는 자들일 것이다.  깊은 이해 없이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무조건적인 자기 긍정이라 오용하며 대단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성공을 부추기는 자들을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바그너를 바라본 니체의 감정도 이러한 것이었을지, 정확히는 알 수는 없지만 공감이 되는 것 같다. 예술은 세계에 퍼져있는 우상들을 선취하여 그것을 표현한다. 표현함으로써 이 세계를 사는 인간의 삶을 설명해 주며, 이러한 설명을 통해 인간은 위로받고 공감받는다. 이유를 모른 채로 불안하거나 상처받은 인간에게는 설명이 곧 치유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본 바그너는 어떠하였는가. 니체에게는 그의 음악이 예술을 통하여 시민들을 선동하여 거대한 의지에 종속되는 기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니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체는 현대 철학의 효시를 알려주었다. 현대 철학의 갈래를 니체를 수용한자와 비판한자로 나눌 수도 있을 것 같다. 니체는 많이 알려져 있음과 동시에 오해와 오용도 많이 받는 학자이다. 특히 깊은 이해를 기피하게 된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오인되며 계속 부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외침이 강렬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후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이지만, 아직 그의 외침이 일상 속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의미를 어떠한 방식으로 느끼고 있는지, 이러한 고찰들은 세대를 넘나드는 문제일 것이며 그가 고전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생명과 죽음을 포함하는 삶 그 자체를 사랑하는 태도,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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