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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Mar 21. 2024

나: 영감주머니 3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텅 빈 천장을 바라본다. 그곳에 보고자 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 싫은 걸 피하고자 한 것 또한 아니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또한 찾고자 할 때 찾을 수 없으며, 피하고자 할 때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소진해 버린다.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그것이 쾌의 추구이든, 불쾌로부터의 도피이든,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 인해서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근거이자 조건이다. 그것을 향한 고민은 우울한 사람의 초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썩 쾌활한 행색 또한 못 된다. 단지 이렇게 나지막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무언가로 채우려 한들, 그것들은 우리 곁에 잠시 머물 뿐이다. 불변은 희망 섞인 환상이니 가치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자유와 생명이 그러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쫓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것들을 떠내려 보내고 있는가? 이것들을 염려치 않는 것이 의무의 수행이라면, 우리는 우리 아닌 것들을 위한 공범이다. 그러니 이러할 때 뒤틀림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공허한 천장이다. 애정을 그토록 바랐지만, 바랐던 것을 애정이라 칭할 수 있는 걸까? 따스함은 눅눅함으로, 설렘은 비이성으로, 인연은 합리성으로, 나귀 앞에 매달린 당근처럼 원하고자 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이질적인 것으로 변해버린다. 이것들을 단순히 소비했다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일 소비로 인하여 이것들이 무가치 해졌다면, 우리는 소비 이외에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가?


 인간은 모두 공허 앞에 선 단독자이다. 누구나 빠짐없이 그것과 대면하며 살아간다. 인간들을 인도하길 자처하던 하늘의 빛은 희미해져 버린 지 오래이다. 인지  모를 부담스러움이 인간들을 자신으로부터 외면하게 만든 걸까. 우리는 그것 앞에서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절벽 앞에 서서 내뱉을 뿐이다. 오직 평온만... 오직 평온만을...



작업노트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고대 희랍어 포이에시스(poiesis, ποίησις)는 가공이나 제작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의 제작은 단순히 물질의 변형을 뜻하는 것이 아닌, 제작자가 생각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참된 모습으로 자연의 물질을 가공함을 뜻한다. 그리고 포이에시스를 위한 기술을 테크네(techne, τέχνη)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라틴어에서 아르스(ars)라고 번역되어 art의 어원이 되었다.


 예술가는 자연을 선취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참된 모습으로 가공함을 통해 작품을 제작한다. 이때 예술가의 주관이 담긴 조화로움이 자연의 배치를 바꾸는 기술이 되어 예술가 스스로를 표현해 준다. 자연의 물질들과 인간의 구성성분은 같다. 이 둘이 다른 이유는 단지 구성성분들의 배치의 차이이다. 자신의 고유한 배치를 자연물을 가공하여 표현하는 것은 곧 내재된 자신의 외화가 된다. 그러므로 표현된 작품은 예술가와 다른 것이 아니다. 배치의 고유성이 곧 자신의 존재이다.


2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 신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쾌락을 위해 신체를 홀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누워서 유튜브 보기... 멍 때리면서 인스타 피드 넘기기.. 카페인 과다 복용.... 이것들은 무엇을 위한 행동인가? 정신이 무언가에 길들여짐과 동시에, 일상에서 신체의 소외를 느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무력하게 소비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소외시켰는가?


 권태가 두렵기 때문에 소모적인 시간 죽이기를 반복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 나의 존재가 옅어지는 시간, 권태는 불안하다. 인간은 불안한 채로 세계에 내던져져 있다. 필연적인 죽음이 결정된 채로 세계에 초대된 방문자. 내가 원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지만, 이미 와버린 이상 나를 끝내는 죽음은 너무나 두렵고 부담스럽다. 부담스러움을 피해 다른 흥미로운 것들로 시선을 옮겨보지만, 막연한 불안함을 떨치지는 못한다. 불안을 잊으려 충실하게 일상을 보내보려고 하지만, 피로에 지쳐 잠시 숨을 가다듬으려고 할 때 불안은 너무나 쉽게 우리에게 침습해 온다. 세상에 표현되는 자신이 적어지며 옅어짐에 불안하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과 권태를 잊기 위하여 더 쉽고 간편하며 자극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언젠가 마주해야 할 것에게 멀어지기 위해.


 신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있었을까. 표현도 잘 못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순박한 친구. 하지만 항상 나를 도움을 주는 친구. 내가 세계를 인식할 수 있음과 세계에 표현될 수 있음은 오로지 내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항상 무언가를 받아들이거나 표현할 준비가 되어있는 가능성의 집합으로서의 신체. 얼마나 멋진 친구인가! 유한한 한계를 지니며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신체를 보아라. 우리는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이 친구와 함께 소통하며 세계 속에 나다움을 표현한다. 나는 이 친구를 소중히 대하였는가? 이 친구와의 관계가 만족스러운가? 이 친구와 협력하여 나다움을 잘 표현했는가? 질문들을 쫓다 보면 무력한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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