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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bk Mar 15. 2024

나: 영감주머니 2

For all artist

모든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전하기 위한 토막글들을 기록해두고자 합니다.  

이름하여 영감주머니~

잘 부탁드립니다:)


1


 관찰은 우리가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내면으로 수용해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개인들은 엄밀하게 각각이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우리의 감각기관 외부에 있는 물질들은 독립적으로 내재된 가치를 표현하지 않는다. 물질들은 개인의 관찰과 상호 작용을 통하여 세계의 일부분이 되어 내재된 역량들을 펼칠 기회를 얻는다. 이러한 시점에서 관찰자는 창조자이다.


 그렇다면 세계 내부의 관찰자 자신의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세계 내부의 '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만들어낸 '나'는 나의 세계 속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나'를 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쇼윈도로만 대한다면, 나는 끝없는 소외에 빠질 것이다. 나를 인지하기 위해선  '나'의 바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의 쇼윈도를 철거하여 공실로 남겨둔다면, 그 자리에는 공허함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나'를 인지하는 것은 자극을 수용하는 역할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자극을 받았을 때의 반응이 곧 개인의 존재를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공허함에 만물이 무자극 해진다면 나는 '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걸까. 나를 표현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을 평온이라 생각한다면 끝없는 허무주의에 빠질 것 같다.  '나'를 동역학적 힘과 같은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파동으로 생각해 보자. 진폭이 한없이 0에 수렴한다면 나는 안정적이고 한결같은 '나'가 될 것이지만, 이것이 죽음과 다른 게 무엇인가, 바이탈 사인의 최후처럼 끝없는 경고음이 나에게 경종을 울린다. 


 자신을 박제된 채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선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어야만 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창조가 될 기회를 부여한다. 이러한 표현의 과정에서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당하는 객체의 경계는 허물어지며, 그 자리에는 상호침투하는 소통이 채워진다. 소통이 부재한 채로는 나와 나 아닌 너는 있을 수 없다. 내가 네가 아닐 이유는, 네가 내가 아닐 이유들과 다르지 않다.


작업노트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objet a> 2024, digital photography

 리히터는 시점을 흐리는 방식으로 초연한 시야를 표현한다. 시큰둥한 시선은 이미지에 익명성을 가져다주 편안한 거리감을 제공한다. 이러한 시선은 그 목적을 객체를 개념 안으로 포섭하는 것에 두지 않게 되어 매 순간 분화되는 물활론적 세계를 포착할 수 있다. 초연한 시야는 관람자에게 행간이 되어 여운을 소화시킬 여유를 제공해 준다.


2


 보통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구든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요소들이 있다. 성격, 외모, 친구, 애인, 자산, 만족감, 삶의 질... 등등.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기준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지, 갈증에 떠밀려 요구하기를 반복할 뿐 의문을 던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하나의 특정한 개인의 모든 측정한 수치들이 평균에 들어맞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중앙값에 해당하는 자가 있더라도, 중앙값의 수치는 매초마다 바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들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모집단이 계속 변화하니 중앙값을 장시간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이 이 정도의 엄밀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니 이러한 논의가 유의하지 않다 느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집단의 변화에 의해 중앙값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이 인류 전체와 만나는 경험을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이란 경험의 한계에 갇혀있을 것이다. 그러니 개인이 생각하는 보통의 모집단은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이다. 그리고 모든 사안에 자신의 모집단을 적용하는 것 또한 어렵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각기 다른 사안들마다 모집단에서 간추린 각각의 표본들로 자신의 보통을 만든다. 인간은 경험으로 갇힌 텅 빈 공터 속에서 자신의 테두리들을 바라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보통과 같은 주관적 기준들을 세우려 할 때, 사람들이 그 기준이 어떤 계기들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아보려 하는 것보다 그 기준을 당연하다 여기는 태도를 가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개인은 기준생성과정을 외면함으로써 기준을 생성한 책임 또한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 생각한 기준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때에도 그 아픔의 책임으로부터 회피한다. 하지만 그 기준들은 분명 그 주관적인 체험 속 세계의 기준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기준의 생성 책임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개인의 기준을 수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주관적 기준들을 특정 의지에 의해 통제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것이 가능한 작업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주관적 세계 속 기준의 생성이 온전히 개인의 의지에 의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자신이 만든 기준으로 생기는 영향들이 자신의 세계관이라는 무게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무게감이 타인의 단점에 대한 거부감을 걷어내어 주고, 타인이 만든 기준이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 또한 덜 민감하게 해 줄 것이다. 가치가 와해되며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창조자로서의 성숙함과 무게감이 타인과 더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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