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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Nov 08. 2024

나를 나이게 하는 힘.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를 설명하는 것들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청년 창업가, 1인 사장, 앞장다르크(마켓주최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었다.

전시와 뮤지컬 관람, 등산, 아웃도어운동(클라이밍, 프리다이빙), 글쓰기.


이제는 나를 설명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흐려졌다. 운무처럼.


낯선 시골 외딴집에서

고립된 섬처럼 육아를 한 지 3년,

다시 전처럼 가게를 열었다.

예전엔 택배와 픽업만 하는 오픈작업실이었다면

이제는 언제든 누구든 드나드실 수 있는 잼카페로.

예전엔 제발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였다면

이제는 누구라도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이곳에 살면서 관계 맺은 지인들이 그랬다.

"언니,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oo이 엄마로만 알고 있었는데.." 등.

내가 어디서 무얼 하던 사람인지

살아온 인생사를 제대로 이야기 안 했으니 그럴 수 밖에.

‘타지에서 연고 없이 시골로 온 아기 엄마’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보통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경우의 수는

1. 쭉 나고 자랐음

2. 타지로 갔다가 부모님이 계신 이곳으로 돌아옴

3. 함양이 고향인 배우자를 만나 정착하게 됨

4. 연고는 없지만 나이가 들어 자식들 다 독립시키고 부부가 귀농하러 옴.

정도.

우리처럼

둘 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선

양가 부모님도 안 계신 이곳을,

게다가 아기를 안고 제 발로 온 케이스는 본 적이 없다,


임신 기간 동안 주말마다 와서

간접경험한 이곳은

‘춥고 덥고 벌레는 많지만

밤하늘에 별이 쏟아지고

반딧불이를 볼 수 있으며

여유와 낭만이 가득한 시골.‘

이었기에.

시골에서의 낭만 가득한 삶만 꿈꾸며

태어난 지 한 달 된 신생아를 안고 온 것부터 잘못되었을까.

여유와 낭만은 개뿔.

‘살아남기’가 과제였다.


비 오는 날이면 툭하면 전기가 나가고,

전기세 폭탄 맞고(여기서 말하는 폭탄이라는 건 몇십 아니라 몇 백 단위...)

세탁기 돌리고 나면 금방 따뜻한 물이 떨어져

한겨울에 아기 목욕시키다 말고 포트에 물 끓이는 일이 부지기수.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전자제품들 줄줄이 고장 나고,

하수구가 막혀 몇날며칠 화장실 두 곳과 세탁실 물바다되고.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돗개를 키우게 되고.

옆마을 개가 범해서(?) 새끼 7마리까지 늘어나고.

지금 떠오르는 것들만 이 정도.

30여 년 간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을

함양에 온 지난 3년 간 다 겪었다.

마치 로빈슨크루소의 무인도 생존기처럼.

그야말로 좌충우돌 하먕생존기였다.


육아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닌데,

생존육아를 하니 더더욱.

게다가 문화인프라가 부족한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좋아하던

전시, 공연, 클라이밍 등과 같은 취미들과 멀어졌다.

이따금 아이를 태우고 가까운 타도시의 미술관에 가곤 했지만

그조차도 카시트 거부 + 유모차 거부 심한

예민한 아이와 함께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시간의 여유가 아닌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


요즘의 난 그야말로 ‘정서적 탈진’ 된 상태였다.

정서적 탈진이란

방전된 배터리와도 같다.

잔량이 얼마 남지 않으면 제 기능을 못하는 배터리처럼

감정 자원 소진으로 정서적 탈진이 일어난 상태라는.

떠오르는 글감은 줄곧 메모만 해두었다.

하나의 글로 태어나지 못한 채.

한자리에서 집중해서 글을 쓰는 에너지가 고갈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나를 설명하는 것들이 흐려져만 간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 하기로 한다.

수없이 탈곡해서 완성도 있는 글을 쓰고 싶지만

쓰지 않으면 휘발되지 않는가.

‘기록은 기억을 앞선다.’는 믿음대로

다시 기록해나가 보기로 한다.

지금처럼 외부행사를 앞둔 다소 마음 바쁜 와중에도

아이가 하원할 시간이 채 몇분 안 남은 상황임에도

일단, 쓰고 보기로.



2024.11.1 오후 4:45에 저장된 글




너무나 좋아하는 서도호 작가의 <집 속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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