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감자(HSP)의 자아성찰
작년 말 올해 초
부쩍 자주 보이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초민감자’. 신품종 감자인가 싶지만
영어로는 Highly Sensitive Person 줄여서 HSP.
즉 문자 그대로 ‘매우 예민한 사람’을 뜻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초민감자라고 불린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는
타고난 신경학적 특성으로,
주변 환경(소리, 빛, 냄새, 분위기 등)에 남들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몇 해전 금쪽상담소에서 김윤아가 나와
모든 자극에 반응하는 초민감자라고,
그래서 쉽게 번아웃이 온다며
저주받은 공감능력이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내 얘긴가..? 하는 생각을 했고 HSP 테스트를 해보았다.
1. 다른 사람의 기분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O
2. 밝은 빛이나 큰 소리에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O
3. 카페나 붐비는 장소 등 자극이 많은 곳에서 쉽게 지친다. O
4. 하루 일과 중 휴식 시간이 부족하면 금세 예민해진다. O
5. 시끄러운 환경에서는 집중이 어렵다. O
6.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감정이입이 쉽게 된다. O
7. 간혹 별것 아닌 일에도 깊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편이다. O
8. 주변 온도 변화(더위·추위)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O
9.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면 금세 과부하가 걸린다. O
10. 타인의 말투나 표정이 신경 쓰인다. O
11. 낯선 환경(여행, 모임 등)에서 쉽게 긴장한다. X
12. 작은 실수나 실패에도 크게 좌절하는 편이다. O
13. 예술, 음악, 자연 등을 볼 때 강렬한 감동을 느낀다. O
14.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의 사소한 디테일까지 잘 기억한다. O
15. 부정적인 뉴스나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O
16. 공감 능력이 뛰어나 ‘너무 착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O
17.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기 힘들어 스트레스받기도 한다. O
18. 카페인, 약물, 음식 등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O
19.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으면 긴장감이 배가된다. O
20. 깔끔함과 정돈을 추구하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강박을 느끼기도 한다. O
21. 주변에서 나만 모르는 분위기나 감정을 먼저 감지한 적이 있다. O
22. 한 번 상처를 받으면 쉽게 잊지 못한다. O
23. 타인과 갈등이 생기면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O
위 항목 중 ‘13개 이상’ 해당한다면
HSP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전체 23개 항목 중 나에게 해당하는 게 22개.
나머지 한 개
11. 낯선 환경(여행, 모임 등)에서 쉽게 긴장한다
; 사람들과의 모임에서는 긴장하고 여행지에서는 설렌다
도 반쯤 맞으니 명실상부 부정할 수 없이
나는 ‘초민감자’이다.
그래서 인생의 난이도가 높았다.
남들은 쉬운 일도 나에겐 몇 곱절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인간관계’. 그것이 집약된 회사생활.
인간관계에서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오랫동안 힘들어하다가 결국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외치며
퇴사를 한 적이 몇 번 된다.
일하던 동료들은 “왜? 갑자기? 아무 문제없었잖아”
하며 붙잡기 일쑤였다.
그럴 수밖에. 당신들 때문에 힘들다 말 못 하고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까 내색 못했으니.
일은 항상 즐거웠다. 사람이 문제였지.
그렇게 잘 다니던 미술관을 박차고 나왔고
그렇게 잘 다니던 기업을 그만둬버리고
나는 기어이 자영업자가 되었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할 때 표정,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나 강세, 제스처 이런 미세한 차이를 눈치채고 유난히 기 빨려한다. 반대로 나도 표정이나 말투를 신경 많이 쓴다. 밖에서는 ‘말을 예쁘게 한다’, ‘일을 나서서 잘한다’는 말을 들어가며 100점짜리 생활하다가도 막상 집에 들어오면 기진맥진되어 아무것도 못하거나, (그러면 안 되지만) 가족들에게는 나의 순도 100% 날것을 비출 때가 많았다. 남들에게 유난히 신경쓰는 나 줄곧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라던지 ‘병원 24시’ 등 모자이크가 되고 음성변조가 많이 나오는 프로도, 잔인하거나 무서운 영화도 절대 보지 못했다. 어쩌다 친구나 가족에게 이끌려 공포영화를 보게 될 때에는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전 분위기만 조성되어도 아예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 날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고는 혼자 걷는 밤길을 내내 무서워했고 또 언젠가 남편과 기생충을 본 이후로 잔상이 남아 한참 동안 혼자 화장실을 쓰는 시간이 두려웠다. 그건 그저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작은 소음이나 밝은 빛, 온도나 향기에도 민감하다.
그래서 사람 많은 곳은 잘 안 가고 인위적인 향수나 디퓨저를 극도로 싫어한다. 내가 자연을 좋아하는 게 이너피스를 위함이기도 하지만 형형색색 간판이나, 길가의 담배냄새, 시끄러운 소음 공해 등 오감의 어떠한 거슬림 없이 편안을 주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계의 골든리트리버라 할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ENFP임에도 때로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꼭 필요로 해서 내가 진짜 E(외향형)가 맞나 생각했다. MBTI는 E라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사람들을 만나면 기가 빨리는 아이러니함. 사람에게서 에너지를 얻고 사람에게서 고통받는 모순. 그건 사회적 활동 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항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시나 공연에 감동을 받는 일이 잦다. 원래의 취미가 전시회와 뮤지컬 관람이었으니. 한 번은 서울에서 28년지기 친구와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를 보았다. 정성화가 넘버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을 부르는 장면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옆을 보니 친구는 쿨쿨 자고 있었다. 나와서 “엄청 감동적이지 않아?“라는 내게 친구는 “무슨 내용이었어?”로 반문했다.
사실 남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일이 없는 편이다. 그런 내가 남몰래 눈물 버튼이 켜지는 때가 있는데 바로 남의 결혼식에서의 바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 시간. 친구나 지인이 아닌 결혼식에서도 이 장면만큼은 그동안 키워냈을 부모님의 노고와, 그 순간 마주한 부모 자식 간의 감정이 이입돼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한다. 얼마 전 아이의 어린이집 수료행사에 가서도 예기치 않은 곳에서 눈물을 흘렸다. 7세 친구들이 졸업가운을 입고 학사모를 쓴 채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아이들이 처음 이 어린이집에 들어와서, 몇 년간 선생님과 친구들과 이곳에서 쌓았을 추억이 스쳐 지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울었다. 남편은 이런 나보고 ”왜 이러는데 여기 우는 사람 너밖에 없다. “며 비웃었다.
HSP는 단순히 예민한 성격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민감성이 나타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감각적 HSP
(Sensory Processing Sensitivity, SPS)
밝은 빛, 시끄러운 소리, 특정한 냄새 등에 쉽게 반응
한다. 사람 많은 곳에 오래 있으면 피로감을 느낀다.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를 잘 감지한다.
감정적 HSP
(Emotional Sensitivity, ES)
타인의 감정을 쉽게 공감하며, 영향을 받는다. 감동적인 영화나 책을 보면 강한 감정을 느낀다.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쉽게 받으며,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기억한다.
직관적 HSP
(Intuitive Sensitivity, IS)
한 가지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성향이 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많은 정보를 수집하려 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으며,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다.
신경 예민형 HSP
(Overstimulated Sensitivity, OS)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낯선 환경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감동도 잘 받고,
감정이입도 잘하고,
공감도 잘하고,
배려도 잘하고.
그래서 학창 시절이나 회사생활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칭찬 듣거나 예쁨 받아왔다.
그런데 반대로 나는 지쳐만 갔다.
육아를 하면서는 더욱더.
그 아이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받아들여 감정이 동일시되니. 게다가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라. 다음에 <예민한 엄마가 예민한 아이를 키우면 벌어지는 일들>을 주제로 글을 적어봐야겠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집에 오면 사회적 가면을 벗고, 자극을 주는 요인이 사라진 편안한 공간에서 온전히 쉼을 하는 나였다. HSP인 내가 육아를 하니 남들보다 당연히 힘들 수밖에. 가족도 연인도 누구와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생각하던, 사적인 공간을 중시하는 나에게 아기는 그런 거리 따위 지켜줄 리가 없다.
18개월 동안 등 대고 자지 않고 안겨서만 잤으며, 두 돌이 넘도록 소변보는 잠깐의 틈도 주지 않았고, 남편에게 맡기고 샤워라도 할라 치면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떠나가라 울었고, 세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잘 때 나 없으면 못 자는 엄마 껌딱지에, (날 닮았는지) 밖에서는 ‘귀공자’, ‘도련님’으로 불리다가도 집에 오면 돌변해서는 감정쓰레기통처럼 나에게 짜증과 투정을 곱절로 쏟아내는, 마치 지킬앤하이드같은 아이를 키우며 나는 뾰족한 바늘이 나를 24시간 찌르는 느낌을 받아왔다.
30대 엄마와 37개월 아들 예민한 두 사람이 수시로 투닥투닥하는 걸 보곤 남편은 “그만 싸워 둘이. 왜 이리 짜증 내냐 둘 다.” 라고 중재한다. 예민한 고래 둘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남편. 미안하고 고맙다 (너라도 무던해서 다행이야)
물론 초민감자가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타인의 감정과 분위기를 잘 읽어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이로 인해 상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하고,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수많은 문화, 예술 영역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영향이 있다. 그러니 에너지 소모가 빠른 단점은 나를 지치게 하는 외부자극을 최소화하거나 그 자극을 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꾸준히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하다.
남들보다 쉽게 지치는 삶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사소한 것에도
즐거움과 감동을 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니.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