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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 문을 열어두는 마음

나의 육아관, 엄마로서의 가치관

by 초원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사건은 2022년 1월 1일, 새해 첫날에 찾아왔다. 그날로 더 이상 ‘김아라’가 아니었다. ‘선률이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긴 산행의 들머리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고보면 항상 아이를 좋아했다. 친구의 아이, 이웃의 아이, 손님의 아이까지. 갓난아기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예전 내 작업실을 스스럼없이 드나들며 방앗간처럼 찾곤 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아가씨가 남의 아기 그렇게 예뻐라하지 말고 빨리 결혼해서 네 아기나 낳아.” 하고 핀잔을 주셨다. 그럼 나는 으레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남의 애니까 예쁘지요, 잠깐 보니까요. 제 애라면 이렇게 마냥 예뻐할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알고 있었다. 육아는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것을.


결혼도, 아이도 내게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다 결혼을 한다 해도 아이 없이 사는 삶을 상상하곤 했다. 내 앞가림도 변변치 못한 내가 과연 누군가를 길러낼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스스로 의문이었으니까. 그런데 늘 인생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나는 어쩌다 결혼을 했고, 어느새 임신을 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직 어른이 다 되지 못했는데, 그릇이 안되는데. 무엇보다 인생에서 늘 나 자신을 1순위로 두던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그날. 2022년 1월 1일 오후 3시 9분, 아홉달 조금 넘게 나랑 탯줄로 이어져 있던 아이가 세상에 첫 울음을 터뜨렸다. 부서질 것처럼 연약하고 작은 몸을 처음 품에 안는 순간, 뜻밖의 생각이 스쳤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대신 죽을 수도 있겠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자기희생적인 생각. 낯설었지만 동시에 경이로웠다.


육아의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낸 것은 우연히 접한 배우 정은표의 말이었다. 그는 영재라 불리는 아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런 아이들의 특성은 굉장히 좋은 그릇을 가지고 태어나요. 그런데 부모가 이걸 채우려고 하면 넘쳐버려요. 부모가 채우려 하지 말고 잘 따라가 주면 꽉 채워지진 않지만 그릇이 많이 커지죠. 그 그릇은 언제든지 자기 스스로 채울 수 있어요.” IQ가 높은 영재아이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모든 아이에게 해당된다고 믿는다. 아이는 저마다의 크기와 모양을 지닌 그릇을 안고 태어난다. 부모가 끌고 가려 한다면 아이는 부모의 그릇만큼밖에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부모가 물러서 준다면, 아이는 부모보다 훨씬 큰 대접만 한 그릇으로 자랄 수도 있다.


어릴 적 자주 말하곤 했다. “나는 아이를 낳으면 새장 속에서 키우지 않고, 넓은 초원에서 방목하듯 키울 거야.”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새장의 울타리가 아니라,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는 열린 하늘이라는 것을. 내 삶은 오래도록 새장 속의 새 같았다.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칠수록 더 단단히 갇히곤 했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고 싶었지만, 알게 모르게 부모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의존해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생각보다 이른 결혼, 연고 없는 함양이라는 낯선 땅에 정착한 것도 그 새장에서 벗어나고자 한 몸부림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꾸린 가정에서 내가 세운 단 하나의 원칙은 이것이었다. ‘자기주도적인 아이로 키우자.’


그래서 선률이가 태어난지 6개월, 대부분 아이들이 떠먹여 주는 미음을 먹을 때 자기주도 이유식을 시작했다. “엄마 말대로 해,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는 “어떤 옷을 입을래?”,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작은 결정부터 아이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 결과 아이는 자기주도적인 것을 넘어 때로는 자기중심적이 되었다. 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은 절대 입지 않았고, 심지어는 오늘의 운전할 사람과 뒷자리에 앉을 사람까지 정하려 들었다. 친정 식구들은 “너무 선택권을 많이 줘서 그렇다.”며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작은 선택의 경험이 쌓여야 큰 갈림길에서도 스스로의 확신으로 길을 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자란 사람은 누구의 탓도, 어떤 원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은영 박사는 육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귀한 손님이어야 한다. 귀한 손님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내 기준의 행복을 강요하지 않는다. 아이는 자신만의 생각과 리듬을 가진 온전한 인격체다. 부모는 그저 곁에서 지켜보고, 좋아하는 일을 응원하며,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은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 쏟고, 떠나고자 할 때는 언제든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도록. 나는 그저 새장 문을 활짝 열어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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