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삶: 영화 <패들턴>, 도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아래 글에는 영화 <패들턴>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평일 낮에는 각자 일을 하고, 저녁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피자를 데워 먹는다. 텔레비전 화면엔 대사까지 줄줄이 꾀고 있는 쿵후 영화 'Death Punch'. 한 손엔 피자를 들고, 다른 한 팔로는 영화 장면에 맞춰 무술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잘 자" 인사를 하는 앤디. 평일이 가고, 또다시 주말이 찾아오면, 이들이 만들어낸 공놀이 '패들턴'을 한다. 순서를 바꿔가며 라켓으로 공을 치는 마이클과 앤디. 벽에 튕겨진 공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낡은 드럼통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목표다. 내일도, 모레도 오늘과 같은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둘에게 마이클의 암 진단 소식은 큰 변수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마이클은 앤디에게 약물을 통한 안락사를 원한다고 말하며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까지의 여정을 함께해달라고 부탁한다. 표현이 서툰 앤디는 마이클의 약물을 사러 몇 시간씩 운전해서 같이 가면서도 비용은 자기가 부담할 것이라며 마이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마이클 몰래 장난감 금고를 사서 약을 숨겨놓기도 한다. 여행 내내 감정적이고 예민했던 앤디는 끝내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낸다. "난 이 과정 동안 정상적일 수 없어..." 앤디는 어쩌면 마이클보다 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치료가 불가능한가요?" 병원 침대에 앉아있는 마이클 옆, 서 있던 앤디가 더듬더듬 의사에게 질문한다.
"두 분이 어떤 사이라고 하셨죠?"
"... 이웃이에요."
혼자 살면서 한시도 혼자인 적이 없는 이들은 서로의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이웃이면서 친구이자 인생을 함께한 동반자다.
결혼처럼 연결고리를 의무적으로 유지할 법적 제도나 함께 책임져야 할 아이는 없어도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며 자유롭고 싶은 만큼 자유롭고, 안정적이고 싶은 만큼 안정적일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의 만남. 선택적 가족을 형성한다. 영화 <패들턴>처럼 극적인,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하는 두 사람은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겠지만, 영화를 통해 이런 삶도 살 수 있다며 나에게 선택지 하나를 더 제공한다. 한국에서 동성친구와의 2인 가족을 꾸린다고 할 때 참고할 조금 더 친근하고 현실적인 모습은 도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속에 있다. 어쩌면 내가 현재 하고 있는 고민을 이미 다 마치고 색다른 삶의 방식을 실행에 옮긴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작가인 김하나와 황선우는 각자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살다 40대 무렵에 룸메이트가 되었다. 서로를 처음 알게 되고 동거를 결심하게 된 계기와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고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읽다 보면 나의 상상도 같이 구체화된다. 좋아하는 노래를 매일 선곡하여 만들어온 플레이리스트처럼 서로를 즐겁게 하는 공통된 취향이 있지만, 그 뒤에 가려져있던 달라도 너무 다른 둘의 생활양식 또한 자리한다. 1인 가구를 유지해온 기간만큼이나 개성이 강해진 각자의 생활양식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을 겪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도' 가질 수 있는, 혹은 '결혼 생활이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편안함과 소중함을 누리고 있다는 것.
나의 삶만으로도 벅찬 요즘, 결혼이나 출산 중 어느 것도 필수로 여기지 않고 더불어 연애마저 활발히 하고 있지 않다. 경제적인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성향이나 취향이 지극히 개인에 따라 발달되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노력도 안 하고 걱정하기만 하며 미래에 비관적인 세대가 아니라, 어떤 세대보다 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있다고 변호하고 싶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한 나에게는 혼자 사는 삶만이 정답일까. 아니, 이젠 정답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정답이다. 선택지가 결혼 혹은 1인 가정에 국한되는 두 개가 아닌 무수히 많다는 것을 생각하며 좀 느긋하게 살아도 되겠다. 이게 아니면 저것도 해보고 저게 안 맞으면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