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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씨 May 06. 2020

두 페이지의 인생

영화 <Ride Like a Girl>을 본 후

타닥타닥. 이름 씨씨. 학력 타닥타닥. 경력. 타닥타닥.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손가락과 달리 요동치는 마음으로 다시 그때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너는 앞으로 뭐 하고 싶어?”


고등학교 삼 학년이 되고 담임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아 진행되는 진로상담에서 들을 법한 이 말. 

사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 대표로부터 이 주 전에 들은 말이다.


‘응? 그만둔다고 한 적 없는데..’


나의 진로에 호의를 베풀어줄 듯한 질문으로 시작된 이 대화는 예정되어있는 휴직기간까지 시간을 줄 테니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끝났다.

‘아, 이런 게 희망퇴직이구나.’

자본주의적 웃음으로 가려져 있던 내 마음은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채워졌다. 


‘그래, 언젠가 그만두려고 했지.’

이 상황에 대해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같지만 사실은 자기 방어 적으)로 생각을 해본다.

마치 이 상황의 결정권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처럼, 마치 나의 의견도 반영된 것처럼.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점차 가라앉지 않았고, 그 후 일주일 동안 황당함, 분노, 후련함, 슬픔이란 감정까지 동반하여 널뛰기를 반복했다.


“영화 보러 갈래?”

요동치는 감정 속에서도 애써 태연한 척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무슨 영화인지도, 몇 분 동안 전개될지도 모른 채 덤덤히 자동차 핸들을 잡고 십 분을 달려와 도착한 영화관.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과 같이 마실 맥주만 생각하며 K15번 좌석에 앉았다.


스크린이 좌우로 넓어지고, 조명이 꺼진다. 

라라걸(2019) 출처: 다음 영화

삼천 이백 번의 대회 출전, 일곱 번 낙마, 열여섯 번의 골절을 겪고 또다시 도전하여 *호주 멜버른 컵 백오십오 년 역사상 여성 최초로 우승한 기수 미셸 페인에 대한 영화 <*라라걸>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강조된 것은 우승 뒤에 감춰진 그의 인내.

변변한 여성 기수용 대기실도 없었던 시절 홀로 차를 몰고 다니며 대회 출전을 하고, 낙마 사고로 전신마비, 뇌출혈, 언어장애를 겪고도 포기하지 않고 재활하여 다시 말을 타는 인물에 걸맞은 단어다.

레이스를 하는 과정에서도 꼭 필요한 태도였던 인내는 결국 미셸 페인에게 기수로써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다. 


‘어머니는 나에게 인내를 가르쳐주려고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을까.’

의도되었든 아니든 영화를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 왈칵. 그동안의 불안했던 마음이 터져 나오듯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흐르기 시작한 내 눈물은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내가 밑바닥을 치고도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어디서 나올까?

나는 나의 열정을 어디에 쓰고 싶은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영화관 계단을 뚜벅뚜벅 내려온 순간부터 쭉 미셸 페인의 서사가 안겨준 질문에 대답을 찾는다.

정답도 오답도 없는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오늘의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준 채 꿋꿋하게 조금 덜 인간적인 문체로 작성해본다. 


향후 계획. 타닥타닥 타닥타닥.


소리에 맞춰 인생이 정리되고 있다. 


*1861년 첫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11월 첫째 주 화요일에 개최되는 세계 최대 경마대회이다. 현재까지 단 4명의 여성 기수가 출전했다. 


*원제는 <Ride Like a Girl>이며, 레이첼 그리피스가 감독한 호주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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