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매일 같은 시각에 출근하는 직장인은 주말에도 출근 시간만 되면 눈이 번쩍 떠진다. 얼마 전 라식 수술을 한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손을 뻗어 안경부터 찾는다. 이별한 사람은 떠나간 연인의 습관을 지닌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8주간 에세이 수업을 들으며 목요일마다 과제를 제출했던 나는, 수업이 다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목요일이 되니 또 글을 쓰고 있다. 이런! 수업이 끝나면 창작의 고통은 잠시 잊고 쉬어보려 했건만.
지난 8주동안 나의 일주일은 글쓰기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먼저 토요일은 에세이 수업 듣는 날. 무거운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가선 선생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업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실을 나선다. 이번 과제는 끝났고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일단 논다. 다음 과제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제쳐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말을 보낸다. 중간중간 다음 과제로 뭘 쓸지 고민하긴 하지만 아직 직접적인 고뇌가 닥칠 시기는 아니다.
그렇게 창작 노트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월요일을 맞이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나면 손에 땀이 약간 나기 시작한다. 벌써 월요일이 다 지나갔다니. 노트에는 아무 것도 없다니. 과제 제출까지는 화수목 3일. 이제는 슬슬 주제에 맞는 글감을 찾아야 한다. 글감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날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망망대해에서 구조선을 찾듯 열심히 발굴해내야 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주제에 대해 캐묻거나, 옛날에 쓴 일기를 뒤적거리거나, 노트에다 지금 생각나는 걸 다 써 본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아침에 눈을 뜰 때 갑자기 계시라도 받은 듯 글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행히 월요일이나 화요일까지 글감이 떠오르면 창작 노트에 브레인스토밍을 하며 관련 내용을 최대한 많이 찾아낸다. 그리고는 어디에 초점을 맞출 지 주제를 확실히 정한 후 아웃라인을 짠다. 이렇게 뭘 쓸 지 정하면 큰 산은 하나 넘은 것이다. 남은 건 초고를 쓰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일. 눈이 빠지도록 활자를 읽고 또 읽다 지쳐 더이상 손 대고 싶지 않아지면 목요일 밤 12시가 지나기 전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낸다. 드디어 보이는 '발송 완료' 메시지. 야호! 끝났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발송을 완료할 수 있을 리 없다. 대부분은 뭘 쓸 지 못 정한 채로 고통스럽게 수요일을 맞는다. 본격적으로 머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일을 하면서도 뭘 쓸 지 생각해야 한다. 그나마 머릿속에 희미하 떠오르는 소재들은 에세이로 써내기에 빈약하다. '도대체 뭘 써야되지? 이것도 마음에 안 들고, 저것도 마음에 안 드네! 젠장!' 복잡한 머리를 안고 퇴근을 하면 집에서도 고민이 이어진다.
이렇게까지 쓸 거리가 떠오르지 않으면 노트를 펼치고 떠오르는 생각이나 최근 있었던 일을 모조리 적어본다. 두서없이 휘갈겨 놓은 노트를 내려다보며 쓸 만한 내용을 묶어 건져올린다. 운이 좋게 찾아내면 다행이고, 여기서도 실패하면 목요일 밤까지 어깨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고 일상을 보내야 한다.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고, 일을 해도 하는 게 아니고, 밥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 창작의 고통이여! 저를 놓아 주소서...
제출 당일인 목요일에는 어떻게든 글을 써낸다. 아니, 짜낸다. 소재나 주제가 영 마음에 안 들고 문장이 어색해도 일단 어떻게든 완성한 후 메일을 보낸다. 차마 다시 읽어보기 두려운 결과물이지만 일단 제출은 해야한다. 문우들 앞에서 허름한 글을 발표할 생각을 하면 속이 좀 쓰리긴 하지만, 끝났다는 안도감이 먼저 밀려온다.
이렇게 나는 규칙적으로 고통받았다가 안도했다가 또 고통받는 생활을 8주동안 했다. 두 달 동안 어깨에 돌덩이를 올려두고선, 수업이 다 끝나면 가벼워질 어깨를 상상했다. 마지막 과제를 해치우며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여태 못한 것들을 하며 실컷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막상 목요일이 다가오니 귀신같이 또 무엇을 쓸 지 고민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이제는 과제도 없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니. 과제가 끝나면 세상이 아름다워보이고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친구를 만나서 놀 줄 알았는데 또 머리를 싸매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나는 사실 고통받는 것을 즐기는 변태였던 것일까?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만든 셀프 지옥에서 타이핑을 하고 있는 나. 어이가 없어서 웃기기도 하고, 글쓰기가 습관이 되길 바라왔기에 의도치 않게 소원이 이루어진 것인가 싶기도 하다.
수업이 끝나면 앞으로 글쓰기 생활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오히려 잘된 것 같다. 내 성격상 지금 손을 떼면 언제 다시 글쓸 의욕이 생길 지 모르니까 말이다. 목요일이 가까워지며 잔잔한 압박감이 밀려올 때면 글쓰기 수업의 흔적이 내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결 가벼워진 어깨에 돌덩이까진 아니고 돌멩이정도는 올려두어도 괜찮을 듯 싶다. 아무래도 당분간 나에게 목요일은 '글요일'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