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YOU 인터뷰 #6
한 사람의 인생은 곧 한 권의 책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책을 한 권 읽는 것과 같다.
우리와 비슷한,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과 위로, 용기를 나누고 싶다.
추태수씨는 필자의 10년지기 친구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함께 자랐다. 이 친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일', '실용', '효율'일 것이다. 이러한 친구의 모습을 글로 담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인터뷰를 뒤로 미루었다.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 확고했던 그의 가치관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변화가 정리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두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10년 친구의 모습은 여태까지 알던 것과 사뭇 달랐다. 힘든 변화와 성장통을 겪고 달라진, 새로운 친구의 모습을 처음 마주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ㅣ자기소개부터 간단하게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19살부터 다년간 디자인 창작그룹에 있었어요. 소방서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여러 가지 알바와 자영업을 해봤고요. 현재는 사천에 위치한 위그선 관련 벤처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ㅣ인터뷰 요청 받았을 때 어떠셨나요?
너무 좋아서 바로 한다고 했어요. 사람 만나는 일 자체도 좋고, 십년지기 친구 얼굴 보는 것도 좋고, 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지난 날의 경험과 앞으로의 목표에 대한 정리도 잘 될 것 같았습니다. 인터뷰 준비도 정말 즐겁게 했어요. 지난 날의 경험과 함께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정리했어요. 이제보니 지금까지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쌓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런데 처음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을 때 몇 달 정도 연기했거든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뀌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에요. 인터뷰한지 얼마 안 돼서 그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인터뷰 요청을 받은 당시에는 인터뷰를 할 수 없었습니다.
ㅣ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지금 저를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고 하면 '효율과 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25살 추태수'라고 설명하고 싶어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추태수에서 일과 효율 빼면 시체 아니냐'고 하실테고, 저를 모르는 사람들은 '25살짜리가 일을 얼마나 해봤다고 저런 소리를 하냐' 하실텐데. 저는 항상 '나이답지 않게 일 잘하는 젊은 친구', '능력도 좋고 주변 분위기를 환하게 만드는 사람', '함께 일하고 싶은 탐나는 인재' 이런 말들을 제일 좋아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거든요. 이 변화를 굳이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유, 즐거움, 재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부분들은 인터뷰하면서 많이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ㅣ추태수에서 일과 효율 빼면 시체 아닌가요?(웃음)
(웃음) 여전히 저는 효율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실 효율은 저 자체예요!(웃음) 하지만 인생의 효율을 찾다보니 '일'은 아니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 같네요. 제가 추구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가 일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던 가치관이 바뀐다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재밌었어요. 이런 변화가 제게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런 날이 추태수치고는 빨리 온 것 같습니다.(웃음)
ㅣ서울에서 디자인 창작그룹에 있던 이야기 좀 해주세요.
학교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요. 처음엔 학교의 개념으로 시작했지만 하다보니까 사업자 등록증도 있는 회사가 되었어요. 저희는 주로 역사포스터 디자인을 했어요. 2016년에 호주 애들레이드라는 도시의 히스토리 페스티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도시의 역사가 182년 정도 됐어요. 그래서 182개의 역사 포스터를 애들레이드 아케이드에서 전시했어요. 애들레이드 사람들에게 과거의 우리동네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창작그룹에 있었던 4년의 시간 동안 소중한 경험을 많이 했어요. 금호타이어나 광동제약처럼 대기업 전시회 기획, 운영도 해보고 해외에 나가서 내가 만든 디자인으로 전시회를, 그것도 스무 살에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ㅣ그 곳에서 무엇을 얻었나요?
디자인적 감각을 키운 것. 제가 디자인을 잘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원래 없던 세포가 생긴 느낌이랄까.(웃음) 저는 어릴 때부터 컴퓨터 만지는 걸 좋아했어요. 집에 있는 컴퓨터를 수없이 고장내면서 컴퓨터 고치는 실력을 키웠어요. 그게 좀 발전해서 중고등학생때 학교 컴퓨터 뿐만 아니라 친구들,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개인 컴퓨터, 학원컴퓨터에 생긴 문제들까지 다 해결해주는 사람이 되었어요. 근데 고등학교 졸업할 때 고민이 엄청 많아졌어요. 컴퓨터 잘하는 걸로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전혀 몰랐거든요. 용산 가서 일을 해야 하나, 개업을 해서 출장수리를 해야 하나.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하던 와중에 서울에서 디자인을 배운 거죠. 똑같이 컴퓨터로 하는 건데 고치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어요. 그걸 4년 동안 밤낮없이 주말까지 열심히 했더니 아까 말한 것처럼 세포가 생긴 거죠. 절대 제가 디자인을 잘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한 디자인과 남이 한 디자인을 봤을 때 어떤 부분이 좋고 안 좋고를 판단할 수 있는 저만의 기준이 생긴 거예요. 게임 빌드업으로 따지면 1차, 2차, 3차 기술로 점점 분화해 나가는데 디자인이 첫번째 베이스가 된 거죠. 지금까지도 너무 잘 쓰고 있어요. 제 능력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가 된 거죠. 마냥 컴퓨터 잘 만지는 애에서 컴퓨터도 잘하는데 디자인도 할 줄 아는, 그런 기회가 되었습니다.
HISTORY POSTER (designed by 추태수)
ㅣ 소방서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요?
효율, 또 효율을 얘기하게 되는데.(웃음) 성인이 되니까 군대를 가야 되잖아요. 어차피 가야하는 2년을 어떻게 하면 제일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원래 소방관이라는 직업이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이타적인 직업이니까. 소방관들이랑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논산훈련소에서부터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ㅣ아무래도 소방서에 간다는 게 쉬운 경험은 아닌 것 같아요. 소방서에 처음 갔을 때 어땠나요?
출근 첫날부터 재밌었는데.(웃음) 제가 영상 만들고 디자인을 하다 왔다고 이야기했더니 행정과 홍보교육팀에 배정됐어요. 담당 주임님이 하셨던 말씀이 선명히 기억이 나는데, "하느님이 너를 내게 보내셨나보다!" (웃음) "잘 부탁해, 태수야! 앞으로 나 많이 가르쳐 주라!" 아무래도 영상이나 디자인 쪽으로 일을 해본 적 없는 소방관들이 영상 만들고 디자인까지 해야 하다보니까 저를 반기셨던 것 같아요.
ㅣ홍보교육팀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홍보교육팀은 소방서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을 기록으로 남겨요. 1차적인 목적은 자료 증빙이에요. 소방관들이 현장에 출동해서 어떻게 대응했고, 소방훈련은 어떻게 하고, 어떤 캠패인과 행사를 했는지 자료를 남기는 거예요. 그리고 2차적인 목적은 홍보예요. 앞서 말씀드린 소방서의 활동들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거죠.
화재·구조·구급 출동 벨이 울리면 미리 세팅해 둔 카메라 가방을 챙겨 소방관분들과 함께 출동해요. 현장을 제 카메라에 담고, 자료를 남기고 기사를 썼어요. 추태수 객원기자로 기사도 많이 나가고.(웃음) 제가 찍은 사진과 영상을 방송국에 보내면 지상파 방송에서 제가 찍은 영상과 사진이 나와요. 첫 6개월은 거의 2주처럼 지나갔어요. 내가 존경하는 소방관이랑 똑같은 옷 입고, 똑같은 차 타고, 같이 출동 나가니까. 또 제가 사람들과 소방활동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보람있었어요. 이런 업무 외에도 캠페인 영상, 홍보 영상, 종무식 영상, 대회 영상 등의 제작, 디자인, 행정 사무보조 일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저는 소방관의 업무가 화재진압, 구조구급까지인 줄 알았어요. 많은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근데 2년 동안 소방서에 있어보니 그게 메인이 아니더라고요. 소방관의 업무는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불을 잘 끄는 것보다 불이 안 나는게 제일 좋으니까. 건물 올리기 전에 설계도에 소방시설들이 잘 들어가있나 검토하는 일, 완공 후에도 소방시설들이 잘 작동하는지 점검하는 일, 사고 예방 캠페인, 시민대상 화재예방 및 응급처치 교육, 화재 원인 과학조사, 화재현장 복구지원, 촬영, 언론보도, 디자인 및 영상제작 이런 일까지 소방관들이 다 해요. 전 처음에 놀랬어요. 이런 일들을 전담하는 부처나 기관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봤을 때 거의 모든 일에 소방관들이 관여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다른 부서에 있었으면 몰랐을 텐데 홍보팀에 배치돼서 소방관들이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ㅣ소방서에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있는 국가 공공기관, 체계가 정확하고 규모가 있는 소방서에서 홍보교육활동 업무를 지원하며 2년 동안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이 제게 소중한 경험이 되었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제일 존경하는 소방관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이 너무 소중해요. 같이 일하는 것부터 해서 회식도 함께 하고, 쉬는 시간에 탁구도 치고, 같이 밥먹고, 노래방가고. 제게 형, 누나, 아버지, 어머니처럼 또 인생의 선배로서 함께 해주셨던 2년 동안의 모든 시간이 소중해요. 제가 소집해제하던 날, 저 전역한다고 안내방송도 해주시고, 복도에 나와서 도열까지 해주셨어요. 과장님 퇴임식 때도 이렇게 안 하는데.(웃음) 이게 정말 제 인생에서 너무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이에요. 오늘날까지도 제 행복의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전역하는 게 너무 아쉬운 거예요.(웃음) 웃기죠. 전역이 아쉽다니... 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려고요.
ㅣ다음은...
아! 소방관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요. 전 소방관들이 대단한 사람들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저와 다를 게 없는. 물론 교육 받고 훈련 받은 장비를 가지고 있긴 한데 인간의 범주에서 보면 특별할 게 없는 저와 같은 사람이에요. 평소에 아재개그 하면서 웃고, 탁구치고, 밥 먹고.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저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걸 보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정말 멋진 분들이에요.
ㅣ소방서 이후에는 어떤 일들을 했나요?
내가 잘 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실행해보며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엄청 했어요. 디자인 일, 영상 만드는 일, 알바도 이것저것 했고, 우유 배달도 잠시 했어요. 일주일에 100시간 정도 했으니까 하루에 18시간 정도 일한 거죠. 법륜스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밥벌이를 빨리 해야 한다고. 그 말씀대로 일단 밥벌이는 빨리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알바하면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알바는 '돈을 번다'기 보다는 그냥 노동자, 생산력 제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창업을 했어요. 아는 형님이 동업하자는 제의를 해왔거든요.
ㅣ어떤 일을 창업했나요?
카페를 창업했어요. 디자인 경험과 능력이 쓸모가 있었죠. 그게 재밌더라고요. 내 손으로 무언가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게. 인테리어부터 전단지, 플랜카드 만드는 것도 다 제가 했어요. 장사는 초반에 잘 됐어요. 보통 가게를 하면 자리 잡는 데에 1, 2년이 걸리는데 우리는 3개월 만에 본전이 나왔거든요. 근데 6개월이 넘어가니까 매출이 떨어지면서 창업하기 위해 넣은 돈이랑 제 노동력을 빼고 보니 알바랑 비슷하더라고요? 그냥 돈 벌기 위해 일하는 게 다였죠. 오히려 알바보다 어려웠어요.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많이 받으니까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동업한다는 것도 어려웠고.
ㅣ자영업을 관둔 뒤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자영업을 끝낸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같이 동업하던 형님이 가정사 때문에 계속 함께 하기 어려웠던 점, 또 하나는 거제에 새롭게 생긴 한화 리조트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 것.
사실 서울에 꿈이 있었어요. 어떻게든 서울에서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게를 해보니까 한계를 느꼈어요. 아무리 잘 되어봐야 제 미래가 아닌 거예요. 거기서 아무리 잘 되어봐야 1년 뒤에 가게 하나 더, 2년 뒤에 가게 3개, 아니면 5개. 그거 말고 답이 안 보였거든요. 거기서 벽을 느꼈어요. 보다 지속적이고 생산성있는, 그러니까 창조적인 일을 원했어요. 일을 하면서 개인이 발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화 리조트에 갔어요. 홍보팀 일이라 소방서에서의 일과 비슷했거든요. 영상 잘 만들고, 의전 잘 하고, 열심히 날아다녔어요.(웃음)
ㅣ날아다녔던 한화에서의 일은 왜 그만두셨나요?
거기서도 한계를 느꼈어요. 한계를 너무 빨리 느끼죠?(웃음) 비슷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개인의 성장이 없더라고요. 일은 즐거웠지만 성장 없는 그냥 일이었어요. 제가 한화 벨버디어 마리나에서 짧게 일했는데 그 동안 6곳에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이 왔어요. 그 중 제가 가장 성장할 수 있을만한 곳이 어딘지 고민해서 지금 일하고 있는 맥시멈 코퍼레이션에 입사했어요.
ㅣ맥시멈 코퍼레이션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
위그선 상용사업을 하고 있는 아론비행선박(주)의 사내 벤처회사입니다. 위그선 산업에 관련된 소프트웨어 및 시스템, 하드웨어 부품 및 모듈 등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회사예요. 그 당시에 맥시멈 코퍼레이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보였어요.
ㅣ위그선이 뭔가요?
위그선의 '위그'는 'Wing in Ground(Effect Craft)'라는 뜻이에요. 비행체는 지면에 가까울수록 바람의 양력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수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양력을 받으면 연료를 덜 써도 공중에 뜨기 쉬운 거죠. 연료비가 덜 들면 그만큼 효율적이고요. '위그'라는 것은 그 효과를 일컫는 거예요. 위그선은 그 효과를 이용한 배고요. 이 배는 해수면에서 살짝 떠서 비행을 하는데, 해수면에 착륙도 가능하고 이륙도 가능해요. 비행을 하기 때문에 비행기라고 생각할 텐데, 국제해사기구에서 선박으로 분류되었어요. 비행체이긴 하지만 선박인 거죠. 그래서 위그선이에요, 위그기가 아니라. 위그선은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어요. 헬기보다 빠르고, 비행기와 달리 호버링(제자리 정지비행)도 가능하고 해상 이착륙도 가능해요. 헬기와 비행기는 그럴 수 없거든요. 그래서 구조, 구출, 의료 수송에 용이해요. 해수면에 붙어 가니 레이더에 안 잡혀 군사용으로도 개발되고 있어요. 또 공항이 없는 곳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해서 섬과 섬, 섬과 육지를 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연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어요.
ㅣ맥시멈 사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시나요?
디자인도 하고, 영상도 만들고, 홈페이지도 만들고, 행정도 보고, 국가 R&D 과제 사업 참여도 다 하고 기획서도 써요. 재미있는 업무는 프로그래밍이에요. 맥시멈에서는 지금 위그선의 관제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요. 선박이라도 5-600km 이상 하늘을 나는 배라서 뜨고 앉으려면 관제가 필요해요. 비행기는 공항 관제탑에서 관제를 하죠. 거기서 이착륙을 하니까. 하지만 위그선은 바다에서 이착륙을 해요. 바다에는 관제탑을 세울 수 없잖아요. 바다에 선을 그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위그선만을 관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예요.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면 위그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자세인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요.
ㅣ그곳에서의 일은 성장에 도움이 되나요?
이 일을 한지는 1년 4개월 정도 됐는데 잘 맞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넣을 수 있고, 제가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우면서 일하고 있어요.
근데 저는 제가 배운 것을 어딘가에 써먹는 걸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공부가 너무 필요하다고 느껴지더라고요. 앞으로 수십년을 더 살 건데 더 잘 살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러면 남은 수십 년의 시간 중 어디에 공부 시간을 넣는 게 효율적일까 생각해보니...지금이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에 일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공부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자. 이런 결론이 나왔어요. 이렇게 또 퇴사를 마음먹었어요.(웃음)
ㅣ그럼 퇴사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웃음) 다행히 대표님께서 저를 잘 이해해주셔서 개인 시간이 정말 많이 생겼어요. 그 시간을 다양하게 활용해요. 운동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3D 모델링도 공부하고 있어요. 물론 또 행복한 일들을 꾸미면서요.
ㅣ불과 7년 동안 일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두려움은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신났어요. 물론 선택의 순간이 오면 생각이 많아지는데... 전 이렇게 생각해요. 선택의 순간은 항상 올 거예요. 당연히 희생이 따르죠. 그런데 그 선택하는 순간이 나중이 나을까, 지금이 나을까 생각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거든요. 나중에 30살, 40살, 시간이 지날수록 내 주변환경을 바꾸는 게 어려워지니까요. 확신이 선다면 실행의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힘들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어떤 한계를 느꼈는데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를 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무지에 빠졌을 때죠.(웃음)
ㅣ그 순간들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한데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직장 선배분들께, 소방서의 형·누나, 스승님, 친구들, 가족, 법륜스님까지. 함께 고민해주셨어요. 제 주변의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웃음)
ㅣ인터뷰를 시작할 때 인생의 최우선 가치관이 '일'이었는데 '자유, 재미, 즐거움'으로 바뀌었다고 하셨어
요. 어떤 계기로 바뀌었나요?
제가 독서모임을 1년 조금 넘게 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욕을 자주 먹었어요.(웃음) 왜 그렇게 일 열심히 하면서 사냐고.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는데 어느 순간 와닿더라고요. 내가 일에 왜 그렇게 갇혀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행복이 뭐지? 행복한 일이 뭐지? 이런 고민을 하다 답을 찾았습니다. 몇 년 전, 형, 누나들과 여행하며 춘천 책과인쇄박물관에서 제가 엽서에 남겼던 내용이 떠오르더라고요. 역시 답은 주변에 다 있어요.(웃음) 이게 무엇인지는 조금 있다 알려드릴게요.(웃음)
ㅣ공통 질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요?
내가 성장하는 것. 정확하게 말하면, 배운 걸 익혀서 쓰는 것. 그게 제일 행복인 것 같아요.
ㅣ앞으로 목표나 계획이 있다면?
여러 가지 공부도 하고 행복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20대에 가장 이루려는 것은 경제적 자유를 얻는 거예요. 경제적 자유란 세 가지를 극복하는 거예요. 돈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는 것,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것. 지금도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저는 가능하면 20대에 완전히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욕심많죠?(웃음)
ㅣ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 하나만 소개해 주세요.
두 개를 뽑을 수 있어요. 제 어떤 고민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법륜스님의 말씀과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추천드립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갔던 19살 때부터 법륜스님 말씀을 찾아 들었어요. 제 수많은 고민과 잡생각들을 해결해주셨어요. 제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말씀은 '성인이 되면 반드시 밥 벌이를 해라, 밥 벌이가 되면 잘하는 일을 해라, 잘하는 일 하고 있으면 이제 좋아하는 일을 해라'예요. 늘 제 고민의 돌파구가 되었어요. 또 '원래 처음 하니 안 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결과에 욕심 내니 마음이 불편하다'라는 말도 저의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는 자세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제가 존경하는 직장 상사분께서 추천해주신 책인데, 이 책을 보고 2-3년의 고민이 풀렸어요. '열심히 하는 것과 잘하는 게 절대 비례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의 해답을 바로 얻었습니다.
ㅣ마지막 질문입니다.
'나'라는 사람을 책으로 쓴다면, 그 책의 첫 문장을 뭐라고 쓸 것 같으세요?
아까 말씀드린 엽서인데요. 그 때의 제가 어찌 알았는지 제 행복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하고 있었어요. '행복이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여행하기, 콘서트 가기, 운동하기, 공부하기, 일하기 등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들이 제 행복입니다. 감사합니다.
왜 우리는 공부를 해야하는 걸까, 왜 우리는 일을 해야하는 걸까?
프랑스 작가 미셸 트루니에의 말을 빌려본다.
"일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하면 피곤해지는 게 그 증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계속 일을 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일까?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의적으로 산다기 보다는 타의적으로 살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타의적'이란 타인의 의도 속에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체성을 놓아버리는 것에 가깝다. 다들 그렇게 하기 때문에 나도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 삶의 주체성은 행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아니, 찾아야하나? 어렴풋이 '찾는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의미는 찾기 보다는 부여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다. 결국 나의 일상은 내가 만드는 거니까. 나는 언제 행복을 느낄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위의 질문들에 대한 답은 누가 알고 있는가.
내가 부여하는 내 삶의 의미. 내 행복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