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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May 10. 2020

나의 이야기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서 변하는 것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길어진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오후 5시부터 슬슬 제 할 일을 마친 해는 꾸물꾸물 서쪽에 있는 제집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 참 좋다.

고맙게도 우리 집은 남향이다. 동남향도 서남향도 아닌 정남향 집. 그래서 “나 여기 있소!”하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도, “나 이제 가오!”하고 해가 질 때 모두 거실에 볕이 뜨겁게 혹은 수줍게 들어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바로 수줍게 볕이 들어올 때다. 동시에 이 볕과 함께 글을 쓰는 일이란, 여태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또 여전히 생을 살아감에 행복해서 계란찜마냥 마음이 몽글거리며 벅차오르는 시간이다.


글을 쓴다는 것.

아직 내 가족을 비롯하여 지인들에게도 공공연하게 뱉을 수 없는 말 중 하나다. 사람인지라 숱한 비밀을 제 안에 꼭꼭 숨겨두며 살곤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퍽 부끄러운 비밀이다. 집 앞의 시립도서관 내 분류 기호에 따라 책이 꽂혀있지도 않은 내가, 매년 열리는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당선되어 등단되지 않은 내가, 현재 활동 중인 작가님들과 같은 호칭으로 불린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나는 글을 씁니다.”라고 말한다는 사실이, 저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부끄러움과 스스로 젊은 날의 객기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글을 쓴 지 제법 1년이 다 되어감에도 어느 누구에게나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이런 부끄러움투성인 나의 글쓰기 시작점엔 내가 아주 수다쟁인 것이 큰 활약을 하지 않았나 싶다. 가족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가장 듣는 말 “너는 너무 말이 많아.”

맞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고 내 앞에 앉은 상대방과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런데 사람이란 늘 한계가 있다. 그중 가장 큰 한계는 바로 시간이지 않을까.

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한계,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줄 수 있는 집중력의 한계.

이처럼 사람이란 늘 한계가 있는지라,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말을 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상대가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메모장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기 시작했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수다쟁이의 기질이 또다시 발동할 찰나, 지금의 글을 쓰는 내가 탄생한 것이다.


지난날의 내가 과연 오늘날 내가 글을 쓸 것을 감히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저 책 읽기를 좋아하던 내가, 도서관을 제집처럼 들락날락하던 내가.

간혹 반납이 연기되어 제 대출증으로 책을 빌리지 못하는 날이면 가족 구성원의 대출증까지 동원하던 내가,

오늘날 그 글이라는 것을 직접 쓸 것이라 예상이나 했겠는가.


지는 해를 바라보는 일이 누군가에겐 이루지 못한 바가 짙게 남은 아쉬움일 수 있다.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겐 무언가 시작되는 시간일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이 시나브로 덕분에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글을 쓰는 중이다. 이를 통해 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곧 해가 질 시간이다. 오늘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시작될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위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글을 쓴다. 늘 그래왔듯 천천히, 시나브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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