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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May 22. 2020

그 날, 그러고 싶었다.

-세상의 수많은 별 거에 기꺼이 마주하겠노라.


나는 일기예보와 친한 편은 아냐. 그래서 오늘은 비가 오는지, 최고 온도와 최저 온도는 몇인지, 안개가 잔뜩 껴 운전에 주의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전혀 알 길이 없어. 말했듯 나는 일기예보와 친하지 않거든. 근데 꼭 그런 날이 있다. 아침부터 비가 올 것 같은 거야. 뭔가 순간 내가 강아지가 된 것처럼 비 냄새를 맡은 거지.


아니나 다를까 오늘 저녁부터 비가 온대. 빌어먹을, 나 냄새만 맡았지 우산은 안 챙겼나 봐.


나는 말이야. 대체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날을 좋아하는 편은 절대 아니야. 내 주변의 공기가 나를 누르는 느낌이 들어 그날은 왠지 더욱 어깨가 아픈 느낌이랄까.

근데 꼭 그런 날이 있다. 그냥 내리는 이 빗줄기에 몸을 싣고 싶은 날, 그러니까 이 비에 기꺼이 손을 뻗어 온몸이 젖어도 괜찮은 날 같은.


아니 들어봐, 아까 어땠냐면. 너는 알잖아. 내가 비 오는 날엔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어디 안 나가는 거. 혹여 나가더라도 금세 집에 들어오고 싶어 엉덩이가 옴짝달싹 못하는 거. 근데 오늘의 내가 어땠는지 알아? 그냥 냅다 팔을 뻗어서 내리는 비를 맞았어. 입고 있던 연분홍색 셔츠가 점점 진분홍색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그냥 내리는 비를 맞았어. 비 맞은 생쥐마냥 머리부터 바짓단까지 축축해졌었거든? 분명 다 맞고 나면 온몸 구석구석 찝찝함에 금방 후회할 것 같긴 한데. 얼른 샤워하고 싶어 질텐데, 내가 그랬어, 오늘은 그 축축함마저 너무나 행복했어. 흔치 않잖아, 이렇게 비 맞은 내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날이.


비 오는 날 미친년이라고? 하하 맞아.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었어. 나 정말 미쳤나 봐.


그런 날 있잖아. 아스팔트를 적신 빗줄기에 걷는 거리마다 시멘트 냄새가 가득한데 주차된 자동차 위에 내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낭만적인 날. 밤새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자리에 들고 싶은 날. 나에겐 오늘이 그런 날이었어. 그래서 피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고 그대로 온 마음 다해 비를 마주한 것 같아.


살다 보니 오늘 같은 날이 있더라.

평소에 되게 되게 피하고 싶고 싫어했던 무언가랑 마주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아닌 날, 왜 진작 마주하지 못했을까 싶은 날.

나는 그 무언가가 있을 때마다 오늘을 기억할 거야. 그리곤 다짐할 거야.

‘봐! 직접 겪어보니 아무것도 아니지? 내 상상 속 두려움이 모이고 모여 어쩌면 하나의 괴물을 만든 것뿐이야. 세상엔 별거 아닌 일이 참 많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엔 참 별거 아닌 일이 많아. 물론 집에 와서 난 비 맞는 내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씻는 수고스러움은 있겠지만 말이야.


어휴, 벌써 전화한 지 30분이나 지났네. 내가 너무 수다스러워서 네가 고생이 많다. 내 이야기 듣는 거 재밌다고? 에이,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 근데 나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배고프다. 밥 먹고 다시 연락할게? 응. 응, 그래. 알았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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