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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미 Mar 06. 2022

안식년(安息年)

-언제든 괜찮을 당신의 휴식을 응원하며.


안식년(安息年), 말 그대로 편안할 안, 쉴 식, 해 년. 편안하게 쉬는 해를 뜻한다.

옛 유대인들이 7년마다 1년씩 휴식하던 해로, 그 기간에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로는 1년 동안 땅을 쉬게 해주기 위함이라 본 것 같다.

H의 안식년은 64년째 되든 해 처음으로 자신의 65년 해의 안식년을 공표했다. 유대인들도 7년마다 1년씩은 쉬었는데, 현대의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에 쉼표를 찍고자 마음먹은 게 장장 64년 만이라니.

가히 가장의 무게는 남달랐던 걸까.


가난한 집안의 5녀 중 넷째로 태어난 H.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가 맞는 표현이지만 당시에는 명칭이 달랐으므로 해당 표현을 쓰겠다.)를 다닐 때 배가 고파 학교 가는 길 진달래꽃도 먹고 으레 올기쌀로 주린 배를 채우기 급했다. 10대로 접어들면서 H는 공부보단 일을 해 집안의 보탬이 되는 것을 택했고 그렇게 고향을 등지고 대구로 향했다. 월급날이면 가장 최소한의 돈만 남긴 채 버는 족족 모두 고향 집으로 보냈다. 그렇게 20대가 된 H는 첫 연애와 동시에 결혼, 따라오는 출산과 양육, 그리고 일. 30대도 마찬가지로 출산과 양육, 그리고 또다시 일.


40대에 접어들어서야 부부로서가 아닌 홀로서기를 다짐하고 세 딸과 함께 인생을 꾸려나가고자 결심한다. 지금에야 한 부모 가정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었더라도, 그때 그 시절 여자 혼자 아이 셋을 키우기란 상상을 뛰어넘는 버거움이었으리라. 아이들이 받지 못한 아비의 사랑을 어미는 부족함 없이 주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어미의 몸은 하나였다. 하루가 다르게 아이들은 자랐고, 필요한 교재와 학원은 늘어만 갔다. 부모의 역할은 오롯이 모가 감당해야 했으나, 그런 이유로 제 또래 친구들은 하는 걸 내 자식만 못하게 둘 수는 없었다.

해가 바뀔수록 월급은 오르고 일은 더 많이 했는데도 늘 돈은 부족했다. 기이한 현상이었다.


50대, 한창 자라나는 세 딸의 학업을 위해 가장으로서. 체력의 끝을 모르는 사람처럼 일을 했다. 그사이 장성한 첫째가 직장인이 되었고, 첫째의 월급은 집안의 보탬을 위해 고스란히 H의 몫이 되었다. 한 집안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늘어감에 따라 지출만이 아닌 자그마한 종잣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듯 한숨 한번 제대로 쉬어볼 틈 없는 H의 인생은 뜨거웠고 치열했으며 억척스러웠다.

생을 포기하고 싶은 여러 순간마다 자신의 부재로 인해 남겨질 아이들 모습으로 버틴 세월이 어느덧 60대가 되었고, H는 내년부터 노령연금을 수령할 나이가 되었다. 현재로선 첫째와 둘째, 셋째 모두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H의 걱정은 덜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당신의 삶의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그런 그녀가 64세, 1월이 지나고 2월의 어느 날 선언한다.

“나 내년부터 돈 조금만 벌고 취미생활 할 거야. 라인댄스 배워보려고.”

오 마이 갓. 안식년답지 않은 안식년이다. 평생을 홀로 자급자족하며 삶을 꾸려왔을 그녀에게 일이란, 양만 줄인다면 동시에 곧 취미로 바뀔 수 있는 범주였던가. 노는 법이 서툰 자에게서 나온 묘책이 바로 “돈 조금만 벌기”인 것일까. 다시 생각해봐도 오 마이 갓이다.


나에게 안식년이란, 실질적인 근로를 하지 않고 그 어떤 것이라도 좋다. 자기계발 혹은 취미(?)  어쨌든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것 모두 해보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물었다. 수많은 취미생활 중 왜 라인댄스를 택하셨냐고.


그녀는 답했다. “어떤 사람이 추천해줘서 유○브 영상을 봤어. 거기 영상 사람들이 살랑살랑 움직이는데, 얼마나 우아해 보이고 예뻐 보이던지. 나도 배워보고 싶더라.”

대답과 동시에 애청하는 영상을 나에게도 보여주며 집중하던 H의 표정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던, 내가 몰랐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H의 말대로 영상 속 사람들은 모두 우아했다. 낮은 굽의 힐, 맞춰 입어 안정감을 주는 댄스복, 거기다 트로트 음악에 맞춰 천천히 스텝을 밟던 사람들. 그 속에 있을 H를 상상했다. 예뻤다.

정식으로 수업을 듣기 전 H는 틈틈이 영상을 보고 전신거울 앞에서 연습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쉽다 했고, 생각보다 땀은 많이 난다 했다. 그런데 자신이 뚱뚱한 편이라 다른 사람들과 비교될 것 같아 그건 조금 걱정된다 했다. H는 한참을 자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했다. 대화 말미에 나는 말했다.


“근데 엄마, 생각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엄마가 라인댄스 하는 모습 상상해봤는데, 잘 어울려. 잘하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엄마가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도 괜찮으니, 일단 한 번 해봐!“

H는 끄덕였고,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겠노라고, 대신 복잡한 부분이 있으면 조금만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끄덕였고, H는 반복해서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H의 안식년이 꼭 내년부터 시작되지 않아도, 당장 다음 달부터라도 좋으니 마음 편하게 쉬었으면 좋겠다. 물론 H는 올해 목표 달성을 위해 그러지 않겠지만.

쉬는 법을 모르던 H가 해보고 싶은 취미가 생겨 다행이고,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녀를 응원하고 싶다.

다가 올 그녀의 안식년(安息年)이 몹시도 즐거운 해이길 바라며.

올 해가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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