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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Oct 09. 2021

화이트 코트를 걸쳤다.

그 무게를 짊어지기로 했다.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니 마니, 한 해 더 하니 마니 한참 속을 태우며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어찌저찌 졸업 디펜스를 통과해 최종 논문을 제출했다. 언제나 그렇듯 지금 되돌아보면 뭐가 그리 걱정이 많았나 싶지만, 그 당시에는 그 불안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발버둥 쳤었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밥도 잘 못 먹고, 속이 쓰리고, 끝없이 트림을 했다. 그러나 어느새 그 감정은 또 새로운 불확실성으로 대체되고, 지난 경험들은 달콤 씁쓸한 추억, 그리고 후회로 남게 되었다. 만약 내가 스포일러를 당해 내 삶의 타임라인을 전부 빼곡히 알게 되면 더 이상 걱정을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내가 좋아하는 클라이머가 월드컵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음을 알고도 경기 리플레이를 보면서 혹시나 이 선수가 사실은 제일 잘하지 않았을까, 내가 정보를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이 사이에 내가 다른 다중 우주로 건너와버려서 결과가 바뀌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갖고 초조하게 지켜보는 것처럼, 내 삶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알더라도 혹시나 다르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언제나 조마조마하게 발버둥 치면서, 고민하면서 살아갈 것은 매한가지일 것 같다.


 논문을 내고 사흘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나는 다시 의학대학원으로 돌아왔다. 그 사흘마저도 맥주를 부어라 마셔라 하다 보니 응급의학과로 출근, 혹은 등교를 해야 할 첫 월요일이 술이 깨기도 전에 찾아왔다. 그리고 쏜살같이, 눈 깜짝할 새에 근 세 달 반이 지나갔다. 응급의학과 2주, 외과 2달, 그리고 가정의학과 1달, 정말 숨 가쁘게 지나간 시간이었다. 박사 과정을 거치며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쏟아내었던 나에게 과연 다시 배움에 대한 의욕이 생길 수가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아직까지는 매 과를 돌면서 '아, 정말 내가 의사가 되어가는 길을 걷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날들이 종종 내게 찾아오고 있다.


 이 세 달 반 동안 나는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클라이밍도, 나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사진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의 시간도, 내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해왔던 집안일, 설거지와 고양이 화장실 치우기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하루 종일 병원에서 배우며 일을 하다 저녁에 집에 오면 계속 공부를 하다 쓰러져 자고, 또 새벽에 일어나고, 그런 일상을 반복했다. 사실은 그것이 우리 모두의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박사 과정 동안 내가 그저 최대한 모든 것을 미루며 나와 아내의 삶을 추구했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특히나 외과 로테이션을 돌 때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저녁 여덟 시쯤에 집에 와 밥을 먹곤 열두 시, 한시까지 공부를 하다가 '오늘도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지, ' 하는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다. 나의 아내는 그런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었다. 내가 아침에 5분 안에 먹을 수 있는 아침을 챙겨 주고, 점심과 저녁 도시락을 챙겨 주었다. 정말 시간이 없을 때엔 빠르게, 그러나 든든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매 밤마다 김밥을, 비교적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수 있을 때는 풍성한 도시락을 싸 주었다. 거기에 특별한 디저트, 혹은 짤막하게나마 편지, 간식 등, 정말 피곤한 날들에도 또 기운을 차려 환자를 볼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내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오늘부로 가정의학과를 마쳤다. 새벽 네 시부터 오후 일곱, 여덟 시까지 지속되던 외과 스케줄에 비해서, 딱 아침 여덟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규칙적인 스케줄을 가진 가정의학과가 의외로 훨씬 더 피곤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외과 수술을 하며 하루에 한 명, 두 명의 외과 환자를 보는 것에 비해 15분 간격으로 8시간 동안 서른 명 정도의 환자를 매일, 매일 보는 것은 굉장히 지치는 일이었다. 본 적도 없는 환자의 차트를 전날 밤 미리 다 읽어보고도, 여전히 예측도 할 수 없는 환자의 성향에 따라 당일 내 말하는 방식, 태도를 바꿔가는 일은 정말로, 정말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아주 즐겁고 뿌듯한 시간을 보냈다.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픈 얘기, 가족 얘기, 삶을 마무리하는 얘기, 남아 있는 자식들과 손주, 손녀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이야기, 가정의학과인 만큼 다시 찾아왔을 때 숨 가쁨이 나아지거나, 몸무게가 줄었거나, 혈압이 낮아졌거나 하는 얘기. 인간의 본질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아주 투박하게나마 이야기를 글의 형태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주 감사한 직업, 조금 더 나아가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중학교 졸업식 이후엔 어느 '식'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당시 여자 친구, 혹은 지금의 아내와 케이크를 먹었을 뿐이었다. 굉장히 드물게 '식'에 참석했던 것은 그 후 내가 의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 굳이 부모님이 미국까지 찾아왔던 때였다. 정말 아이러닉 하게도 나의 부모님은, 굳이 여기까지 날아와서도, 내가 왜 '스탠포드'에 가지 못했냐고 물었다. 반박할 힘도 없어 나는 그냥 웃었다. 그 외에 내가 '식'에 참석한 것은 아내와 시 법원에서, 딱 한 명의 증인, 아주 가까운 친구 딱 한 명을 두고 결혼식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아내와 나, 그리고 그 친구는 법원 주차장에 서서 호가든 맥주를 까 시원하게 한 잔을 마셨다.


 아무리 그래도 의학대학원에 입학했던 때는 아주 뿌듯한 순간이었다. 첫 주, 오리엔테이션 주의 마지막 날 금요일의 마지막 이벤트로 의대생에게 화이트 코트가 주어졌다. 의사에게 최고로 상징적인 그 백의 말이다. 한 명, 한 명, 학장이 의학대학원 신입생에게 화이트 코트를 입혀 주었다.


 나는 백의를 입는 것이 싫었다. 아직 의학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내가, 게다가 100명이 소속된 과에서 100번째로, 학기가 시작하기 2주 전 간신히 합격한 자로서 더더욱 입을 자격이 있는가 싶었다. 백의를 입을 때면 사람들의 시선이 유난히 신경쓰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입어야 한다고 아주 확실히 못 박지 않으면 나는 백의를 입지 않았다.


 나는 합리화를 했다. '나는 그런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만드는 의사가 안 될 거야. 아니, 백의가 뭐 실질적으로 의료 행위에 역할을 미치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 지긋한 환자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의대생 [빙수]에요. 의사 선생님 곧 오실 건데 그전에 조금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니, 그게 뭔데? 의대생? 간호사야 테크니션이야 뭐야? 네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어 음.. 의학 대학원생이에요. 의사가 되려고 선생님한테 배우고 있어요. 혼란스럽게 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 그래? 그럼 가운이라도 입던가, 하나도 모르겠잖아.'

 '오케이, 잠시만요.'


 늘 가방에 들고는 다니지만 입지 않았던 가운을 꺼내 입었다. 새하얀, 학교 이름과 내 이름이 커다랗게 박힌 그 백의를. 나는 다시 그 방에 들어가 그 환자와 한참 얘기를 나눴다. 그는 경계를 낮추고 내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았다. 나는 그를 알게 되어서 즐거웠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했다.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하다면서.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래, 너가 화이트 코트를 입는다고 너가 권위적이고 무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 너는 너야.'

 언제나 그렇듯 나의 아내, 녀미는 현명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화이트 가운, 백의는 환자를 위축시키는 권위의 상징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작지만 중요한 '식', 상징이라는 것을. 


 내가 화이트 코트를 입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둘러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정말 간신히 의학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그 상징인 백의를 걸칠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모자라고, 어쩔 수 없이 의대가 마지막으로 고른 존재라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사실 아직까지도 그렇다. 평생 시험이라면 도가 텄다고 생각했던 내가, 처음으로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부족한지 느끼게 된 것이 바로 이 의학대학원이다. 그런 내가, 당신들의 건강을 돌보아줄 그 무거운 '의사'로서의 책임을 질, 그리고 그 상징인 화이트 코트를 입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백의를 입었다. 달라진 것은 딱히 없었다. 나에게 친절한 환자들은 내가 화이트 코트를 입건 말건 늘 그렇듯 나를 편안해하며 나에게 친절했고, 다른 환자들은 내가 백의를 입었건 말건, 내가 나가기를 요청했다. 그랬다. 백의에 대한 무서움은 내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불확실함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어쨌건 나는 그들이 가장 편안하고 건강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그렇게 똑똑하지는 않지만, 내가 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가 나의 아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녀미, 그리고 우리 집 고양이 보리, 구름이와 함께 지내며 느끼는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들과 얘기를 나눈다.


 이제야 나는 백의를 편안하게 입는다. 나는 아마 조금씩 '의사'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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