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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Apr 13. 2024

밤을 견뎌내는 일

조용하나 지치며 두려운 시간

그래도 운이 좋게 아직 어두울 때 집에 돌아와 차트 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뜨거운 이른 봄 햇볕을 쬐며 키보드를 베고 자고 있었다. 얼굴에 남은 키보드 자국이, 아니면 키보드에 묻은 내 얼굴 기름이 기분 나쁜지 잠깐 고민하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잠에 취한 자기합리화를 하고 차트에 내 이름을 새겼다. 그것은 법적인 책임을 지는, 어떤 한 의사의 노트가 되었다. 


휘청휘청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들른 뒤, 얼마 남지 않은 정신을 가다듬어 방문 손잡이를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조금씩 넓어지는 문틈으로 잔잔한 푸른 어둠과 옅은 포근한 향이 새어나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조심히 걸었으나 카페트엔 사르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나의 차가운 발자국이 남았다. 뭉실뭉실한 우리의 이불, 클라우디오를 아주 조심히 걷었지만 늘 그렇듯 아내는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몸을 꾸물거리며 오른쪽으로 돌아 누웠다. 이불 속은 푸른 바깥과 다르게 회분홍빛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사부작거리며 침대에 몸을 뉘이자 차디찬 나의 발끝이 비로소 느껴졌다. 아내는 조금 더 꾸물렁거리며 내 베개로 다가왔다. 내 왼편에서 달콤하고 아련한 향이 났다. 깊은 잠으로 한가득 따뜻함을 모은 아내는 나를 꼭 끌어안아 그것을 내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다리와 발을 내게 휘감아 주자 비로소 내 아리고 예민한 발은 마찬가지로 예민한 나와 함께 같이 녹아 잠에 들었다.


그러다 방문이 열리면 오후 다섯시 사십분이었다. 아내는 부리나케 다시 부억으로 돌아가고, 나는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 커피를 준비하고자 했으나 순서도, 방법도 애매했다. 드리퍼를 두 개를 꺼내지를 않나, 잘못된 필터를 꺼내지를 않나, 물을 다 끓이는 동안 커피를 갈지도 않지를 않나, 아주 가관이었다.


다섯시 사십 오분, 그 새 아내는 식탁을 한가들 채워내었다.

'속 편하게 먹어야 할지, 맛있고 배부르고 먹어야 할 지 잘 모르겠어,' 그는 매일 얘기했다.

그 날의 메뉴는 불족발이었다. 여전히 비몽사몽했던 나는 그 불족발 한 입을 먹자 잠이 확 깨었다. 쉴 새 없이 젓가락질을 하는 내 손끝에 정신이 다시 깃들었다.


허둥지둥 밥을 먹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는 자기가 밥을 먹던 것을 멈추고 내 밤 도시락까지 싸주는 것이었다.

불족발
콩국수
차돌박이
레몬 파스타
하이난 치킨 라이스
돼지 수육

저녁 출근길은 밤 쉬프트의 가장 즐거운 부분 중 하나였다. 아직 남아 있는 늦은 오후의 햇빛 덕에 춥지 않을 뿐더러, 그 시간대의 햇빛은 매일같이 아름다운 노을로 세상을 물들여 주었다. 이미 많은 이들이 퇴근을 해 가벼운 옷차림과 표정으로 러닝을 하거나,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큰 소리로 웃으며 테니스 공을 던지거나, 한결 여유있고 편안한 모습이었다. 나는 불특정다수 그들의 유한 표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아직 퇴근 중인 안타까운 이들은 육차선 베니스 길의 어마어마한 교통 체증에 같혀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그들을 싱그럽게 지나칠 수 있는 것 또한 뒤틀린 즐거움이었다. 병원 주차장에 자전거를 묶어 놓을 때 즈음 저편으로 홀리우드 사인이 석양에 물드는 모습은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물론 앞으로 밤새 열 두시간이 넘게 일을 할 예정이었지만 말이다.


병원에서 밤의 역할은 낮과는 사뭇 다르다. 정말 많은 것이 바쁘게 일어나는 낮과는 달리, 밤의 속도는 정말 느리다. 거의 어떤 수술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떠한 능동적인 치료 계획도 이행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어찌 되었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야 하기 때문이다. 밤 쉬프트의 역할은 밤에 아파 병원에 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것과, 이들을 포함해 이미 입원해 있는 이들을 다시 아침이 찾아오기까지 안정된 상태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밤엔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가 하면, 어떤 밤엔 정말 한낱같은 목숨을 부여잡고 아침까지 끌고가야 하는 치열한 의료적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 같은 수련의에게 있어 보다 더 자율적인, 그리고 무겁고 무서운 책임을 지고 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한적할 것 같았던 밤, 일반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환자의 담당의에게서 긴급하게 전화가 왔다. 환자가 쇼크에 빠졌다는 것이다. 의료적 쇼크는 신체의 기관에 혈류가, 그리고 산소가 제공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아주 심한 염증 혹은 감염 때문일 때도 있고, 심혈관계에 커다란 문제가 있어 심장이 피를 못 뿜어낸다던지, 혈관들이 과하게 팽창했거나 수축했기 때문일 때도 있고, 이 외에도 많은 원인이 있다. 이 환자 같은 경우엔 애초에 심장이 굉장히 약한데 이런 저런 이유로 신장에 큰 문제가 와 몸의 수분을 오줌으로 내보내지 못해 혈압이 너무나 높아졌고 이 높은 압력을 이기지 못해 심장이 더욱더 뛰지 못해 쇼크가 온 것이었다. 심장 기능이 정상의 5퍼센트도 되지 않아 온 몸이 차가웠고,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으며, 심장이 뛰지 못해 생긴 압력을 이기지 못한 폐는 물 속에 잠겨버렸다. 이 사람은 분 단위로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부리나케 중심정맥과 동맥에 카테터를 셋 꽂았다. 내 심장이 정말 빠르고 세게 뛰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하며 큰 숨을 쉬고 빠르게 카테터를 꽂았다. 집착적으로 한 해 내내 연습을 한 보람을 느꼈다. 한 정맥 카테터엔 심장의 뜀을 도와줄 수 있는 약품들을 투약했다. 다른 정맥 카테터론 응급으로 투석을 시작해 신장의 역할을 대신하여 몸의 수분들을 빼내었다. 동맥 카테터론 실시간으로 혈압과 산소 포화도를 재었다.


십 오분 분쯤 지나 환자는 지랄하기 시작했다. 호흡기 마스크, 목에 있는 정맥 카테터, 오줌 양을 잴 수 있게 넣어 둔 요도 카테터가 너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환자를 안정시키려다 내 안경이 날아갔다. 그러나 정말 다행이었다. 정말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살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계속 이 모든 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산소 호흡기 넘어 불평했다. 정말 하기 싫었지만 나는 그를 협박하고 말았다. 


'당신은 1분 전 죽었을 수도 있어요.'


거의 죽었다 살아난 그 두 눈을 부라리며 그는 말했다. 


'Fuck you.' 


그러나 그는 얌전해졌다. 왠지 마음이 놓여 코웃음이 났다. 그는 결국 잘 회복해 ICU (중환자실)에서 나갔다. 




그런가 하면 많은 이들이 죽는것 또한 중환자실이다. 기분 좋게 자전거를 타고 ICU에 도착한 저녁, 환자가 죽었다고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아직 땀이 뻘뻘 나는 채로 병실에 갔다. 환자의 딸이 나에게 쌍욕을 하며 화를 냈다. 왜 자기 아빠가 죽었냐며 말이다. 그는 심각한 심장병과 이런저런 감염으로 쇼크에 빠져 있었다. 환자는 자신의 삶이 끝에 다다랐음을 슬프지만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의료진에게 몇 주간 얘기했다. 자신은 갈 때가 되었다고, 내 선택에 따라 가게 해 달라고.


그러나 환자에겐 치매가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 딸에게 의료적 결정을 내릴 권리가 전해졌다. 환자에겐 그 권리가 없다고 누군가 판단했다. 환자는 매일같이 자신이 죽게 해달라고 했지만, 딸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네 가지 승압제를 온 몸에 흐르게 하고, 목에 구멍을 뚫어 호흡을 하고, 배에 구멍을 뚫어 완벽하게 배합이 된 인공 영양을 투입하여 삶을 유지하게 했다. 그렇게 90일을 버티다 그는 끔찍한 감염으로 죽었다. 딸은 여전히 의료진에게 화를 냈고, 나는 별 할 말이 없었다. 사망 선고를 했고, 나는 너무나 속이 아팠다.



또 그런가 하면, 다른 어떤 환자는 네 번의 심정지를 겪고도 의식이 말짱했다.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밤에 일할 때 그에게 다섯번째 심정지가 왔다. 심폐소생술을 했고, 그의 심장은 또 뛰기로 했다. 물론 계속해서 승압제와 다른 많은 약품이 필요했지만 그의 정신은 온전했다. 그와, 그의 가족과 새벽 세시에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는 할만큼 해 본 것 같다고 그는 얘기했다. 52살의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긴급하게 여러 전문의들을 깨워 얘기를 나눈 후, 우린 그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새벽 네시에 모든 가족들을 불렀다. 네시 반쯤 한 스무 명의 가족이 ICU에 찾아왔다. 우리는 모든 치료를 중단했고, 다섯시 조금 넘어 그는 죽었다. 낡이 밝고, 열시, 열한시가 되도록 먼 가족, 친척들이 찾아왔다. 가족들은 내게 건장했던 그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대충 60명이 되는 어마어마한 가족들의 제일 뒷열에 서 자랑스럽게 웃으며 쉴 새 없이 타코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이었다. 



가끔은 아주 운이 좋아 ICU내 모든 환자들이 안정되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밤도 있다. 그럴 때면 가끔 콜룸 (Call room, 숙직실)에 가 잠을 청한다. 병원 가장 지하에 존재하는 콜룸으로 향할 때면 텅 비고 어두운 병원이 평화로우면서도 두렵다. 작은 소리에도 마음이 두근두근해지곤 한다. 그래도 피곤해 잠이 들곤 하는데, 얼마나 악몽을 많이 꾸는지 모른다. 그리고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새벽 네시에도 '환자가 똥을 못 눴어요' 하는 연락이 온다. 그럴 때마다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음에 감사하며 다시 환자를 보러 간다.


밤에 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게 있어 충분히 잠을 잘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었다. 밤새 입원한 환자를 아침에 보고할 때엔 집에 오면 아침 열시, 열한시쯤 되어 집에 와 차트를 정리하다 보면 열두시, 한 시쯤 잠에 들어 다시 여섯시 반에 나가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정말 운이 좋아 밤새 입원한 환자가 없을 때면 빠르면 여섯시 반, 일곱시면 집에 올 수 있었다. 아직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새벽 공기가 나는 싫지 않았다. 온동네 꽃이 활짝 피기 시작한 이 계절, 무거운 새벽 공기에 꽃 향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집에 오면 항상 달래와 작은 등이 나를 반겨준다. 여섯시에 올 때도, 열한시에 올 때도 있지만, 그들은 나를 반겨준다. 그 따뜻함과 고요함, 안정감이 나를 위로해준다. 밤의 피로와 끝없는 불안이 녹아버린다. 창가엔 올해의 한련화가 예쁘게도 피었고, 식탁 끄트머리엔 새하얀 수국에 마음이 아리다. 무슨 생각하지 모르겠는 달래는 내가 화장실에 갈 때도, 물 한 잔 먹을 때도 쫄래쫄래 계속 따라온다. 

나는 아내가 준비해둔 아침이랄지 저녁을 뎁혀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찬란하게 떠오르는 햇빛 아래 앉아 마저 차트 정리를 한다. 그러다 꾸벅꾸벅 또 잠이 쏟아질 때면, 조심히 방문고리를 돌리고, 이불을 젖혀 몸을 뉘인다. 그러면 또 반쯤 잠든, 뜨끈뜨끈한 아내가 나를 꼭 안아주고, 나는 머리맡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거북이와 벌새 인형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잠에 든다. 제법 피곤하고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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