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천천히 가주련
오지은 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기도 전에 알람을 재빠르게 끄고 보니 새벽 다섯 시 반, 말이 새벽이지 아직 시커먼 밤이다. 포근하고 따뜻하며 달콤한 이불속에서 왜 나가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으나 마땅한 답이 없었다. 드디어 다시 찾아온 토요일,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롭게 쉬면 좋을 텐데, 고작 바위 따위를 오르자고 그 어느 때보다도 일찍 일어나...다...니...
오지은 씨의 목소리에 화들짝 다시 잠에서 깨니 다섯 시 삼십 이분이었다.
'아, 클라이밍 가기로 했지. 분명 오늘도 이 시간부터 일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놀러 가려고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자. 바위를 오르는 일이 얼마나 한정적이고 소중한지 이제 아주 잘 알잖아.'
2분마다 맞춰진 알림 일곱 개를 마저 끄고 기어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루로 기어 나와 불을 켜자, 돌돌 말고 곤히 자고 있던 보리와 구름이는 눈이 부신지 꿈벅거렸다가 찡그렸다가, 못생긴 표정으로 왜 벌써 일어났냐고 묻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녀석들은 소파 위 포근한 담요에서 뛰어내려 현관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루 종일 집을 비울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왠지 짠한 마음을 꾹 누르고,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들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결국 일어났으니 열심히, 즐겁게 클라이밍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운전석에 앉아 내비게이션을 찍으려던 찰나, 같이 카풀을 해서 가려던 친구 놈이 지난밤 술을 너무 많이 먹었다며 한 시간만 있다가 가자는 문자를 보게 되었다. 순간 내가 이러려고 수면 보조제를 먹어가며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섯 시 반에 일어난 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어이가 없다가도 그 녀석의 생일이기에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나는 간식이 될 예정이었던 아내의 양파빵을 아침 삼아 먹고 커피도 좀 더 느긋하게 마실 겸, 집에 잠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현관문을 다시 열고 들어오자, 보리와 구름이는 내가 나갈 때 나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손과 발을 몽실몽실한 몸통 아래 꼭꼭 숨기고 있었다. 아이고, 내 새끼들. 에어 프라이어에 데운 양파빵은 아주 바삭하고 고소했고, 팔팔 끓인 뜨거운 물을 더한 커피는 향긋했다. 문 앞에 앉아 보리와 구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자 보드라운 털 위로 따스하게 그릉거리는 소리가 내 손과 마음 안으로 전해졌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보리와 구름이는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내 새끼들.
귀를 쓰다듬으려면 녀석들은 납작하게 귀를 뒤로 눕혔다. 볼을 쓰다듬으려면 수염을 착, 얼굴에 가까이 붙였다. 머리를 크게 쓰다듬으려면 어찌 내 마음을 아는지 꿍, 하고 내 손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새삼 보리의 늠름한 수염 개수를 세고, 구름이의 말랑말랑하고 예쁜 코랄빛 코(Hex: #cf6c63)를 검지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관심 탱크가 충분히 찼는지 폭신한 담요 위로 다시 퐁, 올라가 그루밍을 하는 보리와 구름이의 모습에 나는 조금 가볍고 따뜻해진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계획에 없었던 고작 30분의 시간으로 나는 보리, 구름이에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 아무래도 겨울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하루가 다르게 늦게 떠오르는 햇살과 서늘해지는 공기에 마루로 나오자마자 담요로 몸을 꽁꽁 싸매고 따뜻한 커피의 향기를 기다린다. 보리와 구름이도 자기네들 담요 위에서 기지개만 켤 뿐, 맘마를 달라고 쫓아오지도 않는다.
그래도 곧, 창밖 저편에 서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로 떠오르는 낮고 옅은 겨울 해가 부엌 남동쪽 창문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잠이 덜 깬 나는 멍하니 카펫 바닥 햇빛이 만들어 준 돗자리 위에 앉아 커피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이 찬란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본다. 몸이 따뜻해진다.
보리와 구름이도 한참 기다렸다는 듯 햇살 속으로 들어와 그제야 웅크리고 있던 온몸을 길게 길게 쭉 늘리며 기지개를 켜고 온 몸을 그루밍한다. 녀석들의 가장 바깥쪽으로 삐죽삐죽 삐져나오는 털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너무나 아름답다.
이렇게 햇살 안에서 느긋한 녀석들을 바라보며 나도 더 느긋해져도 되겠다는 자기 합리화를 한다. 커피를 다 마시고 일을 시작하려다가도 보리와 구름이 옆에 풀썩 누워 겨울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다 보면 마신 커피가 무색하게 다시 잠에 빠져들곤 한다. 재택근무 방침에 따라 왔다갔다 하거나 생산성 없는 미팅에 참석하는 데 낭비하던 시간을 아끼게 되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애초부터 모두 원격으로 할 수 있던 내 업무를 공식적으로 집에서 자유로이 원하는 시간에, 아내와 고양이를 곁에 두고 할 수 있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이 COVID-19 사태 속 몇 안 되는 소중한 부분이다.
그렇게 달콤하게 졸다 보면 태양의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마루를 가득 채웠던 햇빛이 썰물처럼 조금씩 밀려간다. 잠결에 다리에 느껴지는 서늘함에 나는 보리 구름이와 함께 남은 햇빛을 좇아 꾸물꾸물 창가로 기어 올라간다. 오른쪽에는 구름이, 왼쪽에는 보리를 끼고 누워 있으려니 마치 나눗셈 기호가 된 기분이 든다. 하긴, 매일 아침 햇빛을 나눠 가지고 있는 사이다.
그러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창가에만 햇볕이 남아있게 될 즈음, 아내가 안방에서 나와 기지개를 켠다. 보리와 구름이는 쏜살같이 일어나 꼬리를 바짝 세우고 아내를 맞이하러 가고 나도 햇빛에 노릇하게 구워진 몸을 일으켜 인사를 건네러 간다. 아내는 보리, 구름이의 맘마를 챙겨주고, 우리의 맘마를 준비하고, 그릇 정리를 하고, 커피나 차를 마신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또 다른 하루가 복작복작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내는 내가 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그가 기대어 편히 쉴 수 있는 튼튼하고 무성한 나무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나와 보리, 구름이, 기타 가끔씩 찾아오는 아가 고양이들, 수많은 풀들, 지렁이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삶과 공간, 시간, 우주의 근본이 되어 이 모든 것을 따뜻하고 자비롭게 보살펴 주는 아내는 알고 보면 이 집의 태양인지도 모른다. 나라는 나무는 그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감사하게 느껴지는 겨울 햇살은 이른 오후, 그래도 한두어 시까지는 창가에 남아 있다. 그래서 보리와 구름이는 한참을 창가에 앉아서 뒹굴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내와 내가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아 각자 열어 놓은 랩탑 사이를 알짱거린다. 나 또한 창가 쪽으로 계속 의자를 옮기며 마지막까지 햇빛을 좇다가, 다시 내일 찾아올 햇빛을 기대하며 양말을 신고, 옷을 두어 겹 더 껴 입고, 겨울 저녁을 보낼 준비를 한다. 한참 햇빛에 따끈따끈하게 구워진 보리의 배에는 햇빛의 냄새가 가득하다.
1월 1일 새해의 태양이 점점 창가로 옮겨간다. 보리는 이미 창가에서 정신없이 뒹굴고 있고, 곤히 아침잠을 자던 구름이는 자신을 비추던 햇빛이 사라지자 테이블로 퐁, 올라와 다시 햇빛을 쬐며 멍하니 앉아 있다. 나도 조금씩 더 창문 쪽으로 자리를 움직이다 보면 아마 곧 아내가 일어날 것이다.
보리와 구름이, 그리고 나는 이렇게 햇빛을 좇는, 이른바 <해바라기> 크루이다.
보리 구름이가 맘마를 주고 나서도, 놀아주고 나서도, 삼십 분 정도 쓰다듬어 주고 나서도 찡얼거리는 것은 아주 밀도 높은 애정을 달라는 신호이다. 하루에 한 번, 두 번쯤은 꼭 필요한 일과로, 녀석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가장 소중한 순간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거의 1년 내내 나나 아내가 하루 종일 집에 붙어 있었던 한 해, 2020년은 어찌 보면 보리와 구름이에게 가장 행복한 한 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위안이 되었다.
소파 위에 누워서 멍하게 인스타그램을 하다 보면 보리와 구름이가 정말 애틋하게 밑에서 쳐다보곤 한다. 이때 상체가 평평해지게 자리를 잡은 다음 배를 통통 치면 녀석들이 올라오는데, 이때의 어리광과 애교와 세력 다툼은 제법 볼 만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한참을 몸을 돌렸다가, 뒹굴었다가, 머리를 여기저기 꿍꿍 부딪혔다가, 내 몸뚱이 위 원하는 자리를 찾을 때까지 꽤 시간이 걸란다. 이 과정에선 서열마저도 의미가 없어서 구름이가 보리의 목덜미를 무는, 평소엔 절대로 볼 수 없는 진귀한 장면까지 보게 되곤 한다.
결국 자리를 잡고 나면 녀석들은 종종 물리적으로 내 양 팔을 점거하거나, 아주 능동적으로 쓰다듬어달라고 요구를 한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쓸데없이 인스타그램 돋보기 탭에서 스크롤하는 것을 그만두고, 목디스크가 탈출할 것 같은 기분임에도 고개를 숙여 그윽한 눈빛으로 그릉그릉 거리는 보리와 구름이를 바라본다. 고양이 그릉거림의 저주파가 상처 회복에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만은 적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내가 잊을만하면 고양이들은 내 위에 올라와 알려준다. 핸드폰을 하면서 낭비하는 10분을 훨씬 더 값지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보리와 구름이가 내 가슴 위에서 깊이 잠들면 그들의 호흡과 맥박이 느껴지곤 한다. 그 조그마한 심장은 어찌나 빨리 뛰는지, 동물의 심장 박동과 수명이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먹먹해진다. 내 인생이 길어야 100년 정도라고 치면 이들의 묘생은 20, 바라건대 25년 정도일 것이다. 고양이들이 제 맘 내킬 때 10분 정도 올라오는 것은 그렇다면 그들의 시공간에 있어 거의 한 시간 정도, 그들이 잠을 자지 않는 인간 시공간의 여덟 시간 정도 중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주 소중한 시간인 것이다. 나와 아내가 보리, 구름이와 거의 내내 함께했던 이 한 해는, 녀석들의 삶에 있어서는 몇 년 정도의 행복한 시간일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은 쓸데없이 정치 뉴스를 보다, 인스타그램을 하다, 인터넷 커뮤니티 글들을 보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나를 자각할 때면, 나는 보리와 구름이를 보러 간다. 내가 오늘은 녀석들에게 충분히 예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표현을 했을까. 오늘 이 녀석들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충분히 보았을까. 나에게의 1분, 더욱더 쏜살같이 지나가는 고양이 녀석들의 1분은 참으로 달콤하고 씁쓸하며 아련한, 소중한 1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