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빙수 Jan 15. 2021

주먹밥 굴러간다

데굴데굴, 데굴데굴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 또 기어코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는 유난히 텅텅 비어 있었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한참 올라 도착한 블랙 마운틴에는 아직 다른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뇌 안쪽까지 시원해지는 산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오롯이 홀로 나무와 풀, 햇빛, 바위, 그리고 지나다니는 다람쥐와 새, 그리고 사슴이 그려준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이 나만의 것 같았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아직 살짝 얼어 있는 모래가 버석거리며 부서졌다. 왠지 잔잔하게 신이 나 김동률의 앨범 <Monologue> 첫 트랙, <출발>을 속으로 흥얼거리며 걷고 있으려니, 블랙 마운틴 안에서도 평소에 가 본 적 없는 구역의 바위들을 올라보고 싶어졌다. 20kg쯤 되는 크래시 패드 두 장을 들쳐 메고 언덕을 오르자 금세 숨이 가빠왔지만, 왠지 발걸음만은 가벼웠다.


 메인 트레일에서 샛길로 빠져 계곡 사이로 경사진 내리막을 따라 걸었다. 분명 되돌아 올라올 때 궁시렁거리겠지만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따스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내가 오르려던 'Moon Drops'라는 이름을 가진 바위에 도착해서도 그 깊은 계곡은 저 아래까지 계속 이어졌다.


 'Moon Drops' 바위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바로 옆엔 커다란 나무가 자리 잡아 그늘을 드리웠고, 깨끗하게 절단된 바위의 위쪽 면은 연둣빛, 민트빛 이끼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으려니, 아래쪽에선 따뜻한 바람, 위쪽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목탁 소리처럼 들려왔다.


 다만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이 바위가 위치한 지면은 제법 경사져 있었고, 이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엉덩이부터 떨어질 수 있는 평평한 지면에 비해 머리부터 떨어지거나, 계곡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갈 부가적 위험이 존재함을 의미했다. 하필이면 혼자 클라이밍을 온 터라 크래시패드도 부족하고 뒤에서 봐줄 스파터도 없는 데다 바위가 미묘하게 높아 더욱이 부담이 되었다.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와 예쁜 바위를 만나게 되었으니 시도해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패드들이 흘러내려가지 않게 잘 잡아두고, 한 동작씩 이어나가 보았다. 동작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몸이 무겁디 무겁게 느껴졌다. 물론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내와 함께 신나게 저녁을 먹은 부분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정신의 무거움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예전엔 운동이라 하면 그저 근육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클라이밍을 하면서 몸이 얼마나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깨닫게 된다. 육체적으로 너무나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할 때에도 왠지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날아다닐 때도 있는가 하면 완벽하게 몸 관리를 하고 잘 쉬었음에도 정서적 에너지가 낮을 때엔 땅에서 발을 떼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생각해 보면 결국 근육도, 마음도 모두 뇌 안의 복잡한 작용으로 인해 작동하는 것이니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따뜻하고 편안하게 아내와 보리, 구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째서인지 마음이 굳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즐거운 일도, 좋았던 점도 분명 많았지만 COVID-"19"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2020년 전체가 그렇게 바이러스의 영향 속에서 지나갔고, 일상의 수많은 부분이 변해 버렸다. 그새 나에게 있어 제법 큰 전환점이 될 2021년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이 소중한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그저 아쉽고 다가올 날들에 조금씩 불안감이 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마음이 가라앉아 있을 때면 나의 사고나 언어마저 굳어버리곤 한다. 한국말이건, 영어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한참 어버버 거리는가 하면, 글은 두말할 것도 없다. 간신히 한 문장을 쓰고, 또 어찌어찌 그다음 문장을 썼더니 두 문장이 도저히 이어지지가 않아 지워버리고, 이를 반복하다 보면 내 앞에는 하얀 창에 커서만 깜박거리고 있다.


 그렇다고 마음에 지배당할 수만은 없는 일, 아내가 음식을 준비할 때 조금 더 능동적으로 기운을 내서 사진과 영상을 찍고, 더 맛있게 먹고, 예쁜 보리, 구름이의 사진을 보정하고, 유튜브에서 내가 오르고 싶은 바위들을 찾아보고, 또 주말마다 시간을 내어 바위를 오르러 가고, 그 속에서 순간순간 팟, 하고 튀어 오르는 불꽃을 주워 담아 내 마음의 에너지 탱크를 채워간다. 또 그러다 보면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생길 것이라 믿으면서.


 동작은 다 해 보았으니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할 차례였다.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바위의 중간 부분, 그리고 혹시나 떨어지면 큰일 날 수 있는 마지막 부분 아래 패드를 하나씩 깐 다음, 숨을 크게 쉬면서 속으로는 무겁지 않다, 에너지가 넘친다 등 별의별 주문을 외운 다음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중간중간 패드가 없는 부분을 지날 때엔 부담을 느끼면서도 조금씩 나아가 마지막 동작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위의 가장 높은 부분에서 다음 홀드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짝 몸을 던져야만 했다. 게다가 바로 뒤편에는 또 다른 바위가 자리 잡고 있어, 그럴 일이 거의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잘못 떨어지면 머리를 부딪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분명 머리로는 내가 잡으려는 홀드가 아마 한 손으로도 매달릴 수 있을 만큼 아주 크고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서 던질 마음을 내지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홀드를 세게 움켜쥐곤 우물쭈물하기만 하다 내려오고야 말았다.


 몇 번 더 시도를 했음에도 똑같이 그곳에서 마음을 낼 수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결국 중간 부분에 있던 패드 또한 마지막 부분으로 옮겼다. 이젠 정말로 혹시나 그 부분에서 떨어져도 (아마) 괜찮을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처음부터 바위를 오르기 시작하는데, 원래 패드가 있던 중간 부분의, 여태까지 한 번도 문제가 된 적 없던 동작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손을 떼는 순간 떨어져 허리부터 바닥에 부딪힌 다음 산 밑 끝까지 굴러가는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맙소사. 바위에서 내려와 허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먹으며 잠시 몸도 머리도 식히기로 했다. 지난밤 크리스마스 저녁 준비를 하느라 하루 종일 바쁘고 힘들었을 텐데 기어코 주먹밥 두 개를 정성스레 싸 주었다. 귀엽게 하트를 그린 라벨 스티커까지 붙여서 말이다. 아내가 구운 말차 쿠키, 그리고 같이 아이싱으로 장식한 진저브레드 쿠키도 담겨 있었다.

 '클라이밍은 안전제일', '완등보단 안전 등반, ' 

 메시지가 쓰여있는 쿠키를 보며 웃음이 났다. 산에 오르며 가방 안에서 다리 하나 잘린, 내가 장식했던 오묘한 모습의 진저브레드 퍼슨(person)과 머리와 다리 하나 잘린 강아지 쿠키가 '이 꼴 안 나려면 조심해라,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마지막 동작을 못하고 있는 것도, 패드가 없다고 원래 할 수 있던 동작을 못한 것도 사실 별 일 아니다. 무사히 바위에서 내려와 앉아 있으니까 말이다. 


 주먹밥을 하나 먹기 전, 아내가 싸준 소중한 도시락 사진을 남겨두기로 했다. 

 찍힌 사진을 보니 괜히 흐뭇했다. 혹시나 흔들렸을까 한 장 더 찍기로 했다.

 셔터가 열리고 닫히는 1/50초 동안 가려졌던 뷰파인더에 다시 시야가 들어오는 순간 나는 경악을 했다. 뷰파인더 속, 주먹밥 하나가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멍하니 카메라를 들고, 저 가파른 계곡 아래로 신나게 굴러가는 주먹밥을 바라만 보았다.

 '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가네, '

 '주먹밥 굴러간다. 주먹밥, 굴러간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머릿속엔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면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나도 계곡 아래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이것이 바로 '아부지 돌 굴러가유, '와 같은 상황이구나, '

 라고 생각했다 역시 급박한 상황이 생기면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운 모양이다.


 주먹밥은 낙엽 위로 바삭바삭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점점 급해지는 경사에 녀석은 점점 더 빨라지고 나는 점점 더 느려졌다. 주먹밥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제야 너무나 속상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내가 한껏 정성과 사랑을 담아 싸준, 무려 '사랑해 빙빙, '이라고 쓰여 있는, 놀라울 정도로 동그랬던 주먹밥을 나는 잃어버린 것이었다. 별 희망도 없이 계속 계곡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다행인 건 계곡의 경사가 한 방향이었다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대학 시절 미적분 수업이 떠오르며 '다차원으로 편미분을 할 필요는 없겠구나. 이 방향의 기울기가 어서 0이 되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왠지 부모님한테 혼나고 있을 때 바닥 무늬에서 프랙탈을 찾고 황금비율을 찾는 것처럼 인간은 절박할 때 수학적 사고를 가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어휴.


 결국 주먹밥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미 저 멀리 산 밑 마을까지 굴러가버린 것인지, 아니면 운 좋게 어디서 멈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30분쯤 걸었을까,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나는 능선에 도달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는 더 가파른 계곡이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쉬면서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러져 있는 커다란 나무들 주위로 널려있는 수많은 솔방울을 발로 차며 괜한 화풀이를 했다. 혹시나 주먹밥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면 답이 없겠거니 싶어 솔방울 사이를 뒤져 보았다. 다 주먹밥 같이 생겼다.


 잔잔한 겨울 산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너울거리며 내 얼굴엔 차가움과 따뜻함이 같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낙엽들 위로 그림자와 빛살이 출렁였다. 문득 솔방울 사이로 빛이 반사되는 무언가가 보였다. 마음이 철렁, 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 보았더니 바로 그것은 아내의 주먹밥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주먹밥을 주워 들고는 소리를 질렀다.


 주먹밥을 감싸고 있던 비닐랩은 잔뜩 구멍이 나고 찢겨 녀석의 험난한 여정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그러나 비닐랩 꼭짓점들이 수렴하는 부분에 붙어있던 스티커는 멀쩡해, 주먹밥의 동그란 형태를 꼭 잡아주고 있었다. '사랑해 빙빙, '이란 글자에 눈물이 났다.

 내려오는 것이 30분이었으니 오르는 것은 더 한참이었다. 경사는 어찌나 가파른지, 낙엽들은 어찌나 미끄러운지. 중간에 앉아 쉬면서 주먹밥을 먹었다. 볶은 고기가 들어간 아내의 주먹밥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몇 가지의 재료만으로 정말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주는 아내의 실력은 늘 놀랍기만 하다. 주먹밥을 먹으면서 울다가, 웃다가, 한숨을 쉬다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단단하게 경직되었던 마음의 테두리가 마치 티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었을 때 초코 껍데기가 바삭하게 부서지듯 깨어지는 것 같았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컬러링 북에 하나하나 색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이란 사진이 보정되며 'vibrance'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주먹밥을 되찾기 위한 한 시간이 넘는 대장정 끝에 다시 나는 바위로 돌아왔다. 다른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왔기에 혹시나 남은 주먹밥마저 굴러가지는 않았을까 순간 걱정이 되었으나. 다행히도 '하트' 녀석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떨어지면 가장 위험할, 바위의 가장 높은 부분 아래 패드를 다시 제대로 깔고 바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에너지를 잔뜩 소비했을 터인데, 왠지 몸이 가벼웠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바위는 시원하고 까끌까끌했다. 내가 잡고 있는 부분의 하얀 초크 자국, 그리고 그 위로 퍼져 있는 예쁜 민트빛 이끼들이 아름다웠다. 드디어 나는 바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지막 무브를 남겨놓고 바위의 가장 높은 부분에 다다랐다. 몸을 던질 자신이 있었다. 여태 그렇게 무서워서 고민한 게 무색하게 역시 그다음 홀드는 너무나 깊었고, 순식간에 나는 바위 위에 있었다. 바위에서 내려와 '안전제일' 쿠키를 먹고, 남은 오후 동안도 신나게, 잔뜩 바위를 올랐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나의 <주먹밥 오디세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더니 아내는 한참을 크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주먹밥을 가능한 각지게 싸 보겠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한참 웃었다.


 마음이 무거울 때, 생각이 많을 때, 불안의 덩어리 속 어딘가 내가 떠다닐 때, 아내의 밥은, 도시락은, 그의 존재는 다시 나를 따뜻한 일상으로 불러와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위 위로 찾아온 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