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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빙수 Jan 06. 2021

바위 위로 찾아온 위로

그 위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잘 잘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를 한 것 같은데,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아침에도 일찍 일어났고, 낮잠도 자지 않았고, 딱 좋게 저녁 먹은 것이 소화가 되었고, 멜라토닌 한 알도 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척여도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화들짝 잠에서 깼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아이패드 홈 버튼을 눌러보니 고작 밤 열두 시 반이었다. 온몸이 젖어 있었다. 오줌을 쌌나 싶었는데 식은땀이었다. 축축해진 바지를 벗고 이불 안에 몸을 감싼 뒤 다시 잠을 청해 보았다. 몸 안은 왠지 계속 뜨거운 것 같은데 차가운 밤공기에 증발하는 식은땀에 소름이 돋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뒤척이기만 했다. 잠깐 선잠에 들라 싶으면 나는 또 꿈을 꾸었다. 완전히 잠에서 깨자 의식 속으로 근거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불안과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들기 시작했다. 심박과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마음을 다스렸다. 오랜만에 나의 무의식과 의식이 치열하게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안방 문 밖으로 아내가 마저 살림을 정리하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에 나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렴풋이 아내가 이불 안으로 들어오면서 풀럭이는 그의 온기와 냄새가 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사이로 전해졌다. 그제야 나는 잠에 들었는지, 그다음 기억은 알람이 울렸다는 것이었다. 


 새벽 다섯 시, 얼마나 잘 수 있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이 상태로 내가 과연 밖에 나갈 수 있을까, 나가서 제대로 안전하게, 집중해서, 심지어 혼자 클라이밍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싶기는 한 건가, 고민 덩어리들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내 알람에 살짝 깬 아내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평소 손발이 차가워 힘들어하는 것이 무색하게도 푹 자고 있던 아내는 이렇게나 따뜻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의 냄새는 보들보들하고 몽실몽실한 딸기 스무디 색이다.

 '조심히 잘 다녀와.'

 그제야 나는 '응, ' 하고 대답하며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를 내리고, 보리, 구름, 북북이, 몽몽이 머리를 쓰다듬고 집을 나와 눈부시게 떠오르는 햇빛 방향으로 음악을 빵빵 틀어놓고 세 시간을 달려 조슈아 트리에 결국 도착했다.


 동네 스토니 포인트에 하필이면 비가 와서 클라이밍을 할 수 없고, 마침 12월 말에 만료되는 국립공원 패스를 한 번이라도 더 쓸 겸 뜬금없이 주중에 찾게 된 조슈아 트리에서 꼭 오르고 싶은 문제는 딱 하나, 'John Bachar Memorial Face Problem (JBMFP)'였다. John Bachar는 스토니 포인트에서 클라이밍을 시작해 결국 '프리 솔로 (free solo)' 도중 사고로 삶을 마감한 미국 클라이밍계의 굉장한 선구자로, JBMFP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개척한 수많은 바위들 중 특별히 훌륭한 문제를 골라 붙인 이름이다. 이 문제에 책정된 'V5' 난이도는 누구든 열심히 클라이밍을 하다 보면 목표로 해 볼 만한 정도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그 어려운 경계를 상징한다. 완벽한 90도 수직 페이스 (face) 벽면 위 다양한 홀드와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유연함, 근력, 그리고 5m 정도의 높이에서 크게 마음을 먹고 자신을 믿으며 몸을 던질 수 있을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JBMFP는 조슈아 트리에서 클라이밍을 한다면 반드시 해 봐야만 한다는, 꿈을 꾸게 된다는 그런 상징적이고 클래식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연말과 새해를 맞아, 그리고 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데 있어 이만한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차갑고 상쾌한 이른 아침 공기 사이로 파고드는 햇빛은 벌써부터 강렬하고 뜨거워 내가 바삭바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차용 갓길에 첫 번째로 차를 대고, 예쁜 노란 사막의 빛과 대비되는 새파란 하늘, 그리고 언제 봐도 신기하게 생긴 조슈아 트리들 사이를 걸어 JBMFP 바위에 도착했다. 조용하고 시원하며, 따뜻하고, 편안했다. 나갔다 오라고 등을 밀어준 아내에게 고마웠다.


 흔치 않게 혼자서 하는 클라이밍 세션이었다. 뒤를 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오롯이 나 혼자서 위험을 감수하고, 반대로 오롯이 나 혼자의 힘만으로 바위를 오를 수 있는 기회였다. 충분히 몸을 풀고, 평소보다 조금 더 크래시 패드 배치에 신경을 썼다. 한 동작을 할 때마다 일부러 떨어져 보면서 떨어질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 만일 떨어진다면 내가 어디로 떨어질지, 이에 따라 패드가 어디 있으면 좋을지를 생각하며 미세하게 위치를 조정했다.


 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을 얻어가는 동시에 매 시도마다 완전히 집중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바위를 오를 수 있을지 움직임들을 구상했다. 얇은 홀드들을 잡으면서 분명 내 손가락 관절에 큰 부하가 걸릴 테니 아무리 많아도 열 번 이상 시도해 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 이상 넘어간다면 아마 부상의 위험이 따를 터였다. 움직임을 계속 머릿속에 그리고, 안 되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분석해 한 동작씩 이어 갔다. 


 회복력과 패기만 넘치는 비교적 어렸을 때의 나는 막무가내로 바위에 달라붙고는 했다. 제대로 패드가 안 깔렸는데 내 힘만 믿고 바위를 오르다 떨어져 등이 다 벗겨지기도 하고, 안 되는 것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않고, 제대로 쉬지도 않고 오기만으로 오르려고 했다가 손가락 관절을 다쳐, 그리고 손가락을 안 쓰려다 손목을 다쳐, 더 나아가 팔꿈치까지 다쳐 반년 넘게 클라이밍을 못 하기도 했다. 몇 년 사이에 그래도 노련해졌는지, 요즘은 최대한 다치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이게 클라이밍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클라이밍을 다녀올 때마다 '다친 데는 없어?' 라고 가장 먼저 묻는 아내에게 '응, 아무 데도 안 다쳤어, '라고 대답하는 순간이 좋다. 아내와 구름이와 보리, 내 가족 구성원들 그 누구도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것처럼 이 셋에게도 내가 건강함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이것은 가족과 삶의 무게이며, 가족이 나에게 주는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아랫부분 동작을 잇고 한 5분 정도를 앉아 쉬며 마지막 두 동작을 구상했다. 4m쯤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 동작들은 안정적으로 할 방법이 없었다. 무조건 살짝 몸을 던져서 잡고 버텨야만 했다. 그나마 그 동작들을 구성하는 홀드들은 전체 문제에서 가장 잡기 좋았기에,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하고 동작을 행하면 될 뿐이라고 한참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기분 좋게 문제를 오르기 시작했다. 돌은 차가웠고, 날카롭지만 아직 피부가 많이 남아 있기에 손가락에 감기는 그 감촉이 아주 좋았다. 아주 작은 발 홀드를 믿고 작은 오른손 홀드를 향해 몸을 쭉 늘렸다. 잘 보이지도 않는 홀드, 그 안에서도 둘째 손가락으로 잡아야만 할 작은 굴곡, 조금 위로 엄지로 감싸야만 하는 안쪽으로 파인 요철을 찾기 위해선 촉감에만 의존해야 했다. 왼 발끝을 배꼽까지 높이 올리고 골반을 열어 몸을 바위에 잔뜩 붙인 뒤, 걸리지 않으면 바로 뒤로 나가떨어질 손 끝 한 5mm 정도 되는 바위의 단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간신히 중지와 약지만 걸렸으나 몸은 아직 바위 위에 있어 검지와 새끼손가락도 마저 올려 내 위치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다음이 이제 문제의 동작들이었다. 숨을 한 번 쉬고 몸을 던졌다. 완벽하게 걸렸다. 순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숨을 깊이 쉬면서 '나는 이 번에 끝낼 거야, '라고 몇 번을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이다음만 한 번만 더 던지면 끝이다. 그 홀드는 손바닥을 완전히 감을 수 있어서 한 손으로도 매달려 있을 수도 있을 정도로 좋다 -- 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 무브는 해 본 적이 없었고, 그리고 놓쳤을 때 5m 아래로 떨어지는 방향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시 숨을 몇 번 더 쉬고,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 공포, 사고의 스위치를 끄고, 발을 단단하게 한 뒤 세게 숨을 내뱉으며 코어를 끌어모아 몸을 던졌다.


 그렇게 나는 그 바위에 올랐다. 두 발로 서는 순간 신이 나 소리를 질렀다. 저편, 훨씬 더 높은 암벽을 오르는 로프 클라이머들이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대답해 주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밤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꿈 생각이 났다. 


 나는 막 죽은 참이었다. 


 '신과 함께'처럼 나는 사후 세계에서 여행을 했는데, 매 관문마다 내 삶 속에서 지나쳐간 많은 이들이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판단을 했다. 유치원 시절 나를 따돌렸던 녀석들은 여전히 나를 비웃으며 지나갔다. '친구'라고 불렸던 놈은 일곱 살 때 그랬던 것처럼, 대신 반대쪽 귀에 총알은 넣지 않고 BB총을 쐈다. 손 씻고 물을 안 닦았다고 손바닥을 때렸던 선생은 왠지 차갑게 웃고 있었고, 지독했던 일짱 놈들은 계속 나를 괴롭혔다. 마찬가지로 괴롭힘 당했던, 그러나 내가 도울 수 없었던, 왕따를 당하던 녀석은 나를 원망했다. 선생님들은 너는 그래선 그것밖에 안된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의 아빠 엄마, 그리고 나와 동생에게 폭언을 뱉었고, 아빠와 엄마는 내게 왜 그것밖에 못했냐고 했다. 동생은 책임감 없는 나 때문에 자신만 힘들어졌다고 했다.


 여행의 마지막이었다. 보리와 구름이, 그리고 아내가 서 있었다. 아내는 가만히 쳐다보다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수고했어.' 


 5m 위 바위에 앉아 나는 펑펑 울었다. 아무도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소리를 참지도 못하고 계속 울었다. 안 다치려고 정말 노력하면서도 내가 오르고 싶은 바위를 올랐다고 자랑하고 싶었으나 나는 혼자였다. 아내는 아내 나름대로 집에서 분명 나름 즐겁게 지내고 있었겠지만, 꿈속에서 이미 사후 세계에 있었던 그가 떠올라 너무나 슬펐다. 꿈속에서 나를 안아준 아내가 너무나, 너무나 보고 싶었다.


 한참 있다 바위에서 내려와 내가 오른 영상을 보니, 내 몸으로 느낀 것에 비해 너무나 쉬워 보였다. 한 동작, 동작마다 미세하게 힘의 분배를 조절하고, 바위를 고쳐 잡는 모습은 영상으로 담길 리가 없었다. 빙산의 일각이라던지, 고고하게 떠 있는 백조의 물속 발길질이라던지의 비유와 비슷한 것이 클라이밍이다. 안 그래도 누군가 얼마 전, '클라이밍 그거 뭐 잡고, 일어서고, 쉬워 보이던데요?'라는 말에 헛웃음이 났다.


 인생이라는 것이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누구나 수많은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하고, 노력을 하고, 때로는 다치기도 하고, 때로는 커다란 성취를 얻곤 한다. 한편으로는 내 삶 속 끝없이 일어나는 것만 같은 천만 가지 걱정거리와 자잘한 불만스러운 일들은 타인이 보았을 때나 나 자신이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보았을 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나를 힘들게 하는 수많은 기억, 일부는 실제로 나에게 있어 안 좋은 기억이었을 테고, 일부는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격지심이 상대방에게 투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 수많은 기억들 중에, 내가 지금 같이 인생을 함께하고 있는 아내가 내 무의식 속에서까지 나를 보듬어 주는 존재임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바위에서 내려와서도 계속 질질 짜며 아내가 도시락으로 싸 준 닭죽을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괜히 계속 코 끝이 찡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눈물을 쏟아내며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내는 가만히 바라보더니 모래 먼지 투성이인 나를 꼭 안아주면서 말했다.

 '수고했어. 씻고 나와서 부대찌개 맛있게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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