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일기 - 근황

by 성화

와삭와삭, 참외 하나를 먹는다. 과도가 없어 큰 칼로 조그마한 과일을 깎자니 어설프다. 고구마를 먹었던 접시에 대충 껍질을 치우고 참외를 썰어본다. 앗, 접시에 흠집이 날 뻔했다. 나머지는 칼로 써는 대신 튼튼한 치아로 씹어먹기로 한다. 참외는 엄마가 열무김치와 소고기를 챙겨주실 때 종이 가방 안에 같이 넣어주셨다. 독립해서는 더 많이 웃으며 살길 바란다더니 일이주에 한번은 식사를 하거나 반찬을 가지러 오라고 한다.


혼자 먹을 음식을 위해 냉장고를 채우고 아침 점심 저녁을 생각하는 일이 은근히 귀찮아서 닭고야(닭가슴살/고구마/야채 식단)를 하게 됐다. 살이 많이 쪄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건강 식단은 오히려 복잡하지 않게 금방금방 만들어낼 수 있다.


낮엔 빨래를 돌려놓고 청소기를 밀었다. 바닥에 즐비한 나의 잔해들을 치우고 나니 조금은 개운하다. 아직 싱크대엔 접시 몇 개와 전자레인지 밑판이 씻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집안일이란 원.래. 완벽한 순간이 없는 것이기에 잠시 보류해 둔 것일 뿐이다.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첫 번째 인상은 보통 꿉꿉한 빨래 냄새, 섬유유연제 냄새, 음식 냄새, 또 가끔은 쓰레기 냄새다. 내가 후각에 둔한 편이라 실상 더한 냄새가 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공포감 때문에 환기를 자주 하게 된다. 유튜브의 똘망똘망 야무진 자취생들은 디퓨저며 스피커며 아름다운 소품들을 들여놓고 자신의 공간과 정신 상태를 양호하게 유지하던데, 실상 내가 마주한 삶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물론 나도 오늘의 집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어떻게 내 공간을 꾸미는 게 좋을까 고민한다. 있으면 분위기 전환이 된다기에 잔디색 카펫도 샀고, 과분한 가격을 주고 예쁜 테이블을 샀으며, 방에 어울리는 색깔의 이불보와 선풍기를 마련했다. 한 몸뚱이가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리빙박스 여러 개와 장식장, 트롤리, 작은 책장을 사야 했다. 이사 후 석 달이 흘렀지만 아직도 정리를 못 한 이사 박스가 한두 개 있다. 정리함을 하나 더 사야겠다는 판단이 서고 약간 부담이 되어 물건 사기를 잠시 멈춘 거다. 독립을 위한 예산이 초과한 지 한참 되었다. 기분 내기 쇼핑이 아닌 필수적인 물품만 구매했는데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부모님께 명절이나 생신에 용돈을 드리곤 하는데 그 주기가 짧게 느껴져서 큰 일이다.


그럴 때 꺼내는 앱은 당연 당근이다. 청소기와 밥솥을 거기서 구매했다. 둘 다 잘 돌아가긴 하는데 역시 좀 노쇠해서 딱 그 값만큼만 일하는 모양새다. 요즘 직장에서 경력이 부족한 핫바지로 보이지 않기 위해 스타일링도 어른스럽게 바꾸고 있어서 원래 있던 옷들을 당근하려 한다. 이사 후 딱히 놓을 곳이 없는 독서대같은 물건도 내놓아야 하는데, 사진 찍고 포스팅하고 사람들과 채팅하는 작업이 어찌나 귀찮은지 계속 미루고 있다.


오늘 같은 주말에 침대에 앉아 방을 바라보자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임대인이 도배도 흔쾌히 해주셨고, 나는 의자가 두 개나 있고, 사랑스런 식물들에게 물을 줄 수도, 오직 나만을 위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도 있기 때문에 싱크대가 좁다거나 생수를 둘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사실은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 이 네모난 공간은 내가 스스로 돌볼 수 있고 적당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크기와 컨디션이다. 2년을 생각하고 몸을 뉘게 된 이곳에서 웃는 날도 우는 밤도 있겠지. 나를 지켜주는 추억들을 쌓고 또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갈 일을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지연의 늪 탈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