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의 늪 탈출기

by 성화

23살이 될 때까지 화장을 하지 않았다. 눈썹 정리라도 해라, 고집부려도 금방 할 거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성인이 되고 4년은 민낯으로 잘만 다녔던 거다.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길 원한다는 포부 때문은 아니었다. 왜일까, 그저 돈이 아까워서 혹은 화장의 과정이 너무 복잡해서 되레 포기한 거겠지 싶었다.


긴긴 상담을 받고 있다. 선생님의 질문에는 대답 문장이 자꾸 토막 난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아주 랜덤한 지연이 발생하는 거다. 아빠에게 이따금씩 맞았고 오빠가 더 심하게 맞는 것을 보곤 했다. 지난 두어 계절 동안 그동안의 감정을 말로 꺼내고 또 귀로 듣는 일을 열심히 수행했다.


한번은 새로 발견한 재즈 바 공연을 예약했다. 1인 예약자들을 일렬로 앉혀주는 자리가 있었고, 내 옆자리에는 또래의 남자 한 명이 앉았다. 재즈는 늘 그렇듯 잘 모르겠으면서도 즐거웠다. 악기와 악기가 서로 끼어들고, 적절한 타이밍에 함께 박수를 치고, 사장님과 알바생들은 사람들에게 활기차게 말을 걸었다. 그 남자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이 와하하 웃었다. 공연이 끝나고 디제잉이 있기 때문에 사장님이 나에게 좀 더 있다 가라고 권유했던 것 같다. 잠시의 정적. 나는 롱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워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오늘 공연 좋았어, 복기하며 잠도 잘 잤던 것 같다.


그러니까 별일 아니였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아빠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간 병원에서 이 일을 술술 불며 울었다. 사실 그 옆 사람이랑 얘기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고. 같이 엘리베이터에 탄 남자 후배가 조용히 자기가 가려던 층 버튼을 끄고 나를 따라왔을 때, 또 다른 콘서트에서 남자 관객이 쭈뼛거리며 말을 거는 건가 싶었을 때, 독서 모임에서 옆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쉬는 시간 몰래 중간 의자를 빼버리고 내 옆자리를 차지했을 때, 그때도 도망쳤었다고 실토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내가 전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세팅된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길어 올린 또 다른 사실은 내가 이성이 주는 설렘과 맞을까 봐 두려운 마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상처에 어쩔 줄 몰라서, 친구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는 나를 지겨워할까 봐 다 극복한 척했는지도 모른다. 아, 나는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들키기 싫었던 것 같다. 놀이기구도 싫어, 운전도 무서워, 크고 작은 스릴도 설렘도 모조리 거절하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게 맞았다.


온 마음이 화상으로 뒤덮인 사람이 무슨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너무 오랫동안 나 홀로 식물을 돌보고 음악을 듣거나 커피를 마시러 다녔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혼자 찻집과 맛집을 찾아가 보고 여행도 다녔다. 바다가 보이는 아주 큰 카페에 2인용 자리는 나만 혼자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 생활이 지겨울 수 있고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30대에 깨닫는 것은 남들이 놀랄 일이겠지. 금요일 저녁에 약속이 없으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엄마아빠 집에서 지낼 수 있어 저녁 메이트를 구할 필요가 없는 안일함은 나에게 좋지 않은 거였다.


더디고 더딘 심리적 재활. 교통사고를 꽝 하고 맞은 몸처럼 가동 범위가 너무 안 나온다. 회복의 마음은 어딘가 치열하고 어딘가 나른하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답답해!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긴 치유의 로드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제대로 시작했으니 과정만 맞는다면 제대로 끝나겠지. 이런 과정에 도움이 될 수도, 오히려 생채기를 주고받기도 할 사랑을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하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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