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좋을지 강아지가 좋을지 고민하던 게 시작이었다. 입양을 하기 전에 둘 다 한번씩 경험해보는 게 좋겠다 싶어 유기묘 봉사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설물의 악취는 뇌까지 관통하는 것 같았고 산더미같은 일의 양은 생각한 것보다 조금 더했다. 기세 등등한 설렘을 갖고 문을 열었는데 귀여움을 느끼는 능력과 후각이 금방 마비되는 것 같았다. 유기견 봉사를 간다면 청각이 마비되진 않을까, 주인을 찾고 있는 강아지떼가 동시에 산책!을 외치며 달려들지 않을까 간담이 서늘해졌다.
자선 단체 두어곳에 전부터 기부를 해오고 있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꾸 그들에 대한 회의를 심는 방향으로 흘렀다. 그네들이 얼마나 떼먹는지 아세요? 제가 기부하지 않는 이유는 다 그 때문이에요! 악플인지 비난인지 모를 댓글들을 읽으며 나의 피 같은 돈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게 맞나 의구심이 몰려왔다. 눈이 벌게지도록 검색의 검색을 거듭, 중간에 거쳐가는 곳 없는 후원 방식을 찾게 되는데... 보육원 학생들의 자립금 후원 제도로, 내는 돈에 더해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부분이 있다는 점과 지정 아동에게 계속하여 후원을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후원 요청 이메일을 보냈고, 답신으로 한쪽짜리 아동 소개서를 받았다.
엄마도 아빠도 있는 e라는 아이였다. 한 분은 몸이 아프시고 한 분은 생산직으로 일하시느라 아이들을 케어할 여력이 없어 시설에서 지내는 거였다. e는 나에게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주며 가족과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고 알려주었다.
재작년 영어 강사 일을 관둔 직후 먼 나라의 한 아이를 후원 신청하던 밤, 소리내어 엉엉 운 일이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내 꿈 앞에 자존심을 지킬 확실하고 작은 방법을 찾은 거였을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b도 부모님은 있었지만 그저 살아가는 데 금전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였다. 걔는 나의 최초 펜팔 친구가 돼줬다. 방학이면 들로 산으로 나아가 양과 말과 함께 논다고 한다. 편지가 오가는데 3-4개월씩 걸리기도 하는데, 작년에는 편지의 최대치는 연간 4통을 여름에 다 써버리는 바람에 두 계절 동안 전혀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후원금만 보냈다.
기부 계획을 세우다 학습 봉사마저 덜컥 신청해버렸다. 봉사모임에는 고양이 모임 이후로 나가지 않았는데, 갑작스런 용기로 단독 봉사를 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 좋은 데 돈을 쓰는데 마음 어딘가가 무겁기에 좋은 일을 더 해버려야지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보육원까지 얼마나 먼지, 내 운전 실력이 얼마나 먼지 같은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체력은 매주 목요일 퇴근 후 무급 프로젝트를 수행할만큼이 아니라는 것을 굉장히 금방 깨닫게 되었다.
학습실이 아닌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수업을 하도록 안내를 받았다. 굳이 물을 수 있지만 삼키는 게 나은 질문이 많은 곳이다. s는 먹고 자고 노는 공간에 널브러져 있다가 내가 도착하면 여전한 내복 바람으로 낮은 상을 편다. 숙제는 거의 해오지만, 안하는 날도 있다. 이제 5학년.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기보다 그저 귀엽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도 s와 비슷한 학생들이 많았다. 교정을 하지 않는 친구들마저 발음이 이토록 새는 것인지 그 이유를 파헤치고 싶었다. 사실 이 글도 한 학생에게 “하늘이 앉아.”라고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녜.”라는 대답과 함께 다소곳이 의자에 앉는 모습이 자기 전에 계속 아른거려 시작된 것이다. 덧붙이자면, 아이들은 별명 폭격기와도 같은 존재여서 필자의 영어 이름 Marcy를 메시 티쳐니, 마시멜로니, 메리 티쳐니(그들은 선생님의 진짜 이름을 잘 못외운다) 공을 가지고 놀듯 별명을 생성해댄다. ㅡ해당 이름이 함의한 연배의 느낌은 필자가 국내파라 그걸 가르쳐 주는 이도, 큰 쪽팔림도 없었다고 항변하겠다ㅡ아무렴, 유치원을 졸업한 지 몇년안된 생명체가 유치한 건 용서가 된다.
발음도 발음이고, 너희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는가도 늘 궁금했다. 우리 때도 그랬지만 요즘 아이들은 더더 빨리 자란다. 몸만 미리 커버리고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마음은 길을 잃는 것이다. 키가 170센티인 2학년, 너의 어지러운 마음을 어떻게 대해야할 지 옆반 선생님의 머릿 속도 어지러웠다. 또한 영단어 철자를 너무나도 못외운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마다 학생들은 교실 앞쪽에 핸드폰을 제출하는데, 언제부터 까만 화면을 응시하며 식당에서 아무 소리 없이 앉아있게 된건지 모르겠다. 뇌 한켠이 아예 다른 세대. 이제 어떻게 해야되나, 마음이 쿵 떨어지곤 했다.
마지막으로 결국 아이들의 마음 속엔 뭐가 들어있는지 평생 애가 탈 것이다. 초등학생이 집중을 못하거나, 스피킹 수업에 활발하게 참여하기엔 너무 내성적이거나, 숙제를 하기 싫어하고 책을 집에 두고 오는 건 그래도 괜찮다. 가르쳐주면 되지, 연습하면 되지, 할 수 있다고 예측하면 되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감당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허공을 보고 웃는 너, 5초에 한 번씩 이름을 불러야 대화할 수 있는 너, 칠판에 적혀 있는 문장을 그대로 베껴 쓰는 데도 틀리게 적는 너, 다그치고 다그쳐도 우울에 빠지는 너. 40분의 레슨을 다 마치고, 숙제와 시험 안내를 하고, 포인트를 주고 뺏고, 다음 교실로 서둘러 이동을 하다보면 그런 걸 물어볼 틈이 없었다. 학교에 가지 못한 2년동안 누구와 대화를 했을까. 핸드폰을 할 땐 뭘 보는 걸까. 핸드폰을 하지 않을 땐 누구와 무엇을 하고, 교실에서는 편안한 걸까. 영어가 재미있을까. 누구와 제일 친하고 그 친구가 왜 좋을까.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괜찮았을까.
s와 수업을 하는데 s의 후원자가 아이를 보러 왔다는 연락이 왔다. 아이는 상기된 바이브로 옷을 꺼내며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나갔다 올 준비를 했다. 신났네… 흐름이 끊겨 맥이 풀린 채 부산스런 아이를 보고 있는데, 가만 보니 걔가 한번 신었던 발바닥이 까만 양말이 다시 꺼내 신는다. 보육원은 깨끗하고 아이들은 잘 챙겨 먹고 있는데 아이는 유난히 깡말랐다. 사실 하루 중에 잠시 벗어놨던 양말은 나도 다시 신기도 한다. 함부로 안타까워하면 안될 일 같다. 그래도, 오늘은 꼭 안아주고 싶은 날이 된다.
해외 출장 갔다가 마트에서 분홍 돼지가 그려진 한 권을 골랐더니 외국인 동료가 대신 계산을 해주었다. 아싸… 선물도 하고 돈도 굳었다. 고심하여 고른 엽서에 이런 말들을 적는다. 공부 열심히 하면 이거 다 읽을 수 있어, 영국인들이랑 하이 하와유 하며 까르르 웃을 수 있어. 상 건너 편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 수업시간을 기다렸음을 계속 생색내는 것, 쉼없이 은근한 행복과 희망을 권유하는 것. 그런 게 교육이 아닐까? 아이를 만나지 않는 많은 시간동안 흰 양말을 계속계속 생각하며 그의 집을 찾아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