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간지 두 달만에 첫 현타가 왔다.
2017년 6월 7일의 일기.
(나는 영국워홀을 2017년 5월부터 2년간 다녀왔고, 그 시점의 이야기이다.)
오늘 어학원 수업시간에서 최근 화제가 된 영국 테러 및 IS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유럽 각지에서 온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IS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토론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멍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IS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 뿐, 토론을 하고 내 생각을 말할 정도로 지식이 있진 않았다. 선생님이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데,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일단 그 내용에 대해 잘 모르고, 그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영어단어를 모른다.
그래서 혼자 완전히 딴생각에 빠져 엄청 우울했다. 꼭 내가 엄청난 바보가 돼버린 느낌이었다. 패배감에 젖은 내 모습을 얼른 숨기고 싶은 마음에, 수업이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인터넷에서 이런 문구를 읽었다.
진짜 현재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과거에 이뤘던 것을 잊고,
동네 전단 붙이며 밑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영국에 올 때,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내려놓지는 못했다. 매번 당황스럽거나 어려운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왜 영국까지 와서 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면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나?'이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여기서는 누릴 수 없다 보니, 내가 왜 이런 환경에서 고생해가며 버티고 있는지 회의감이 드는 것이다. 남들은 다 취업해서 승진을 앞둔 '20대 후반'에, 늘 당연하게 누려오던 '따듯한 집과, 내 방과, 엄마가 해준 맛있는 음식', '원활한 소통'을 다 포기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영국에 왔다. 영국 공연계에서 일하고 배우기 위하여. 그러니 내가 노력하고 적응해야 한다. 지금까지 누려온 그 모든 것들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말이다. 영국에 왔으니 영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본인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문화에도 익숙해지고, 영어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인터넷에서 본 다른 글귀 중에, '나이가 들수록 본인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건 그릇의 크기가 달라졌기 때문'이 있었다. 내가 지금 그 과도기에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내 그릇이 가득 차서 새로운 큰 그릇으로 바뀌는 과정. 기존의 그릇을 깨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그릇을 빚는 과정. 당황스럽고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30년 가까이 지내온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인데, 원활한 것이 더 이상하지.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원 없이 깨지는 것이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면서, 배워가는 방법뿐이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고, 마음껏 부딪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