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산투(Monsanto)
여행자에게 장소는 두 가지뿐이다. 말하자면 어떤 곳은 통과하기 위해 존재하고, 다른 어떤 곳은 도착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여행이란 도착을 의미하여야 한다. 이것은 주제 사라마구의 말이다. 그런 면에서 포르투갈 정동쪽, 스페인과의 국경에 인접한 작은 마을 몬산투(Monsanto)는 후자에 속한다. 몬산투는 다시 말해, 지나칠 수 없는 마을이다.
삶의 흔적이 구석기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이 작은 마을은 온통 돌로 이루어져 있다. 산비탈에 터전을 잡은 이 마을에는 도처에 집보다 큰 바위들이 깔려 있고, 그 바위들은 대체 어떻게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는지 꼼짝하지 않는다. 조금만 힘을 주면 굴러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바위들의 앞, 옆, 뒤에서 개미같은 사람이 놀랍게도 조그만 집을 짓고 도시의 그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문 앞에 쳐놓은 발 안에서는 밥 짓는 소리가 들려오고 어느 저녁 식사를 하는 노부부의 대화는 정겹다. 구석기 시대부터 그랬을 것 같은 심상한 풍경이다.
어느 여름 저녁, 그렇게 이 마을을 산책하고 있노라니, 사실 사람이 사는 마을에 바위가 있다기보다는, 바위가 사는 마을에 사람이 틈입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사는 집을 보니 그렇다. 어느 집은 커다란 바위가 지붕의 한 부분이다. 집 뿐만 아니라 이 마을 꼭대기에 있는 성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동안 보았던 가지런히 돌을 쌓아 만든 성벽이 아닌, 성벽의 적지 않은 일부가 울퉁불퉁 기암괴석이다, 그렇게 고르지 못한 우락부락한 성벽의 모습에서는 어떤 공포마저 느껴진다.
거대한 바위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예기치 못한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그의 이름은 제카 아폰수(Zeca Afonso). 어딘가 낯이 익어 안내문을 자세히 보니, 코임브라 구 성당 앞 광장, 아줄레주에 그려져 있던 그 평범한 얼굴의 비범한 사내다. 그 주제 아폰수가 놀랍게도 이 마을에도 있다. 제카 아폰수는 일종의 예명으로, 그는 생전 이 마을을 무척 사랑해 이곳의 집을 샀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집은 집이라기보다는 그저 돌에 가깝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자유를 부르짖던 음유시인이 영감을 얻고자 했던 집은 그러니까, 원시적이고 옹색하고 투박하다. 하지만 어딘가 돌처럼 단단한 신념이 엿보인다. 그를 기리는 안내문에서는 이곳이 그를 기리는 하우스 박물관으로 탈바꿈될 것이라고 쓰여 있다.
석양이 지고 언덕을 따라 다시 마을로 터덜터덜 내려간다. 멀리서 낮은 땅들이 붉게 물들어 있고, 마을 시계탑의 바르셀루스 수탉은 역광에 검게 그을려 있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검어질 때, 나는 문득 뒤를 돌아 올려다본다. 바위들이 여전히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다. 수 백년, 수 천년 동안 나와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견뎌온 바위들이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어쩐지 바위들의 고독이나 침묵 따위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칙칙한 감정들이지만, 사실 바위 뿐만아니라 우리에게도 숙명 같은 것들 말이다. 몬산투의 아름다운 석양이 수천년 그래왔듯, 그렇게 지고 있다.
Monsa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