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마(Fátima)
나는 어쩐 일인지 여전히 종교가 없다. 1981년 그 터키인 킬러는 어쩌면 종교가 있었을까. 외로운 킬러에게는 보통 종교가 없고 바깥도 없다. 아마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지금 파티마에 있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유심히 바라본다면 이곳은 유난히 멀건 회색이나 탁한 하얀색쯤으로 보일것 같다. 도시 전체가 승복 혹은 수녀의 회색빛 옷자락처럼 거룩한 분위기로 물들어 있는 이곳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그곳, 포르투갈 성모 발현의 성지, 파티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어쩐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수도원이나 적막한 산사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렇다할 특징이랄 게 없는 마을에 인적조차 드문데다, 파티마 대성전의 광대하고 황량한 모습과 그 성전의 광장을 무릎을 끓고 고행하는 신도들의 뜨악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곳이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성소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포르투갈에 머무는 동안, 이곳을 나의 가장 조용한 성소로 점찍는다.
유럽은 1차세계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파시즘이라는 전염병이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포르투갈도 때마침 군주제가 무너지며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국민들은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 속에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따금 우리가 흑백화면으로 보던 20세기 초 전간기 이전 유럽인들의 굶주리고 창백한 얼굴들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당시 유럽의 엄혹한 공기를 쉽게 재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 포르투갈의 이름 없는 마을 파티마에서 성모가 발현한다. 프란시스쿠(Francisco), 자신타(Jacinta) 그리고 루시아(Lúcia)라는 시골 목동들 앞에 6번이나 성모가 나타난 것이다. 예언의 메시지를 가지고 말이다.
대성전 앞 미사는 시간대별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신부들에 의해 각자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여느 관광객들처럼 서서 미사를 구경하면서 신부의 입에서 나오는 이국어가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를 두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는데 나중에 안내문을 읽어 보니 그것은 폴란드어였다. 폴란드어로 기도를 하는 신부 앞에서 신도들 어느 누구도 그를 이해못하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모두 폴란드사람이었을까. 종교가 없는 나는 아직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종교가 있는 아내는 빤한 하늘처럼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5월 바티칸시국 광장에서 차를 타고 행렬 도중 터키 출신의 어느 킬러로부터 저격을 당한다. 파티마 성모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아이를 쓰다듬기 위해 상체를 숙이는 찰나였다. 다행히 총알은 심장을 가까스로 비껴나갔고 교황은 목숨을 건진다. 교황은 이후 파티마 성모의 은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말하고는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파티마를 방문하여 성모마리아 조각상의 왕관에 그가 맞은 총알을 봉헌한다.
전쟁통을 지나 기아, 고문, 암살에 이르기까지 지난 100년동안의 모든 엄혹한 공기가 이곳 적막하기 이를데 없는 파티마에 봉인되어 있다. 20세기의 공기를 느끼며 21세기의 나는 언제나 그렇듯, 대성전을 한바퀴 휘돌고는 익숙한 카페에 들러 디카페인을 시켜놓고 누군가를 기다리듯 앉아있다. 나는 여전히 종교가 없다. 암살사건 이후 터키인 킬러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후 그 킬러가 수감된 교도소에서 20분간 독대했다고 한다. 대화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사죄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킬러에게는 이제 종교가 있었을까. 기다리던 구원을 받았을까. 나는 파티마의 어느 카페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며 누군가의 심장을 향해 조준경을 가득 당겨본다. 포르투갈의 서늘한 가을 공기가 조준경에 맺힌다. 아직까지 이곳 파티마는 나의 가장 조용한 성소이다.
Fát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