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옐로 Aug 08. 2022

뫼르소와 당신의 이야기

페소 다 헤구아(Peso da Régua)

 삶에 대해 가벼운 권태와 회의를 느끼는 당신은 시간에 대해서도 그런 감정을 갖기 마련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과 바깥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고 미련을 두지 않는다.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무슨 일에도 동요하지 않을 차가운 심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철없던 한때 그것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이기도 했는데, 8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그것이 다시 한번 녹아내리던 경험을 했다. 나는 포르투갈 중부지방에 자리한 페소 다 헤구아(Peso da Régua)라는 도시를 아내와 딸이이와 함께 걷고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 인상적인 디자인의 도우루 박물관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기념 사진 하나를 찍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더 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도우루 강을 배경으로 찍은 그 사진속에서는 적당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가볍게 날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속에서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깔깔거리고 있었다. 문득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강 위로 유유히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사진 밖으로도 들리는 두 사람의 웃음때문에 나는 급기야 시간을 박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동안 살아오며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도 문득 꽂히듯 날아왔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까뮈가 던졌을 법한 실존적인 질문이었다.


도우루 강은 하늘만큼 평화로운 곳이다


 그러니까, 페소 다 헤구아를 처음 본 것은 언젠가 포르투갈 북쪽 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느 장대한 다리위에서였다. 다리를 건너다 무심결에 차창밖으로 살짝 고개를 틀었을 때, 머릿 속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다리 아래로는 강을 끼고 거짓말같은 도시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오랜 시간 도우루 강 물류 운송의 허브였다고 한다. 무게를 의미하는 페소(Peso)라는 말에서 보듯, 부두에 모이는 말들의 짐의 무게를 잰다는 의미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고, 지금은 무엇보다 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포트와인 생산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와이너리 투어가 목적이었다. 우리도 도시에 머물기 전, 인근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낀 양조장을 찾아서 포트와인 시음도 하고, 뙤약볕 속의 포도밭도 괜히 거닐어보았다. 와인의 맛과 빛깔이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자연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고개를 몇번 끄덕이기도 했다.


Quinta da Roêda라는 포도원, 시음하다가 와인잔을 놓고 사진을 찍자 곧장 예술이 되었다


 페소 다 헤구아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동상은 샌드맨이다. 흡사 코임브라 대학생들의 유니폼 같은 느낌을 주는 어느 검은 망토를 입은 거대한 사나이가 페소 다 헤구아를 반대편 산 위에서 내려다 보고있는데, 검정색 망토때문인지 그것은 어쩐지 을씨년스러워보인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 다르게 실제로 샌드맨은 포르투갈 포트와인을 영국으로 수입하면서 포트와인 역사의 한획을 그은 영국인 거상이었고, 샌드맨은 그대로 수많은 포트와인들의 대표적 브랜드가 되었다.  도시를 둘러보는 것은 관광이 아닌, 가벼운 산책과도 같다. 거리에는 화려한 건물도, 삶의 분주함도 없다. 사람들은 흡사 도우루 강에서 천천히 미끄러져가는 유람선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이따금 와이너리로 향하는 꼬마기차가 그러한 그림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가운데 멀리 서 있는 망토의 남자가 바로, 샌드맨이다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언제까지 차가울 수는 없다' 


 아주 오래전 어느 잡지에서 봤던 이 문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좋아한다. 차갑디 차가운 뫼르소는 마지막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내부의 뜨거운 정염을 드러낸다. 자신을 사회 부적응자로 몰아가는 사회의 압박에도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에 누구보다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죽음이 그 순수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결국 실존이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을 뿐, 타인이 강요할 수도, 타인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가족 사진을 보며 실존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에서 뫼르소가 말하는 자기 확신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내와 딸아이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고, 나는 이제 그것이, 영원하길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Peso da Régua


작가의 이전글 국경마을에는 국경이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