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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수 Sep 10. 2020

로또 한 장의 의미

로또는 약속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Q. 한국인들의 단합을 보여준 3대 사건은?

1) 1997년 IMF외환위기 금 모으기 운동

2) 2002년 한일월드컵 거리응원

3) 제10회차 로또 구입


이 우스갯소리를 처음 접한 시기는 2003년 초였다. 그 출처가 뉴스였는지 인터넷 게시글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세 이벤트만큼은 잊히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왜냐면 지금까지 그 ‘3대 사건’ 중 어느 하나라도 대체할 또 다른 사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막 중학교 3학년이 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중3의 무게라는 게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곧 있으면 고등학생이 된다는 압박이 슬슬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에 몰리면 철이 드는지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학원을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전에는 학원 가는 길이 귀찮아서 걸핏하면 수업을 빼먹곤 했었다. 학원 빠지는데 핑계가 먹힐 리 없지만, 그래도 변명을 하나 하자면 교통이 너무 애매했다. 학원 셔틀버스는 온 동네를 훑고 다녔고 마을버스도 변변치 않았다. 모로 가도 먼 길이었다. 뭔가 매일 ‘가자’와 ‘가지 말자’의 경계에서 저울질하고 있는데 불편한 교통이 핑곗거리를 줌으로써 ‘가지 말자’로 추가 기울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왕 학원에 성실히 다니기로 한 거, 운동도 할 겸 걸어 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 왕복 한 시간 정도 되는 길이었다. 마음을 고쳐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길이 생각보다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버스를 타서는 느낄 수 없는 동네의 작은 변화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무슨 요일에는 농협 앞에서 작은 장터가 열리고, 무슨 요일에는 던킨도너츠에서 이벤트를 하고.


 장 인상 깊었던 건 복권가게였다. 학원 가는 길 중간에는 복권가게가 무슨 거점처럼 띄엄띄엄 놓여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앞에 꽤 긴 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학원 갈 때 보았던 줄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밤에도 줄지 않고 유지된 적도 여러 날 있었다. 어른들은 살을 에는 추위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로또라는 이름의 신종 복권을 사기 위해 묵묵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일확천금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는 어른들, 나는 그들이 노력 없이 한탕을 노리는 도박꾼처럼 못마땅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몽상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02년 말 사업을 시작한 로또는 나오자마자 단숨에 복권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당첨금의 제한이 없다는 점이 컸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택복권이니 체육복권이니 하는 복권들은 1등 얼마, 2등 얼마 하는 당첨금을 걸어놓고 사람들을 유혹했다. 하지만 로또라는 녀석은 판매량에 비례해, 그리고 당첨자 수에 반비례해 금액이 결정되었다. 거기에 만일 1등 당첨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당첨금이 이월되어 다음에 나올 1등에게 몰아주는 파격적인 시스템도 도입했다. 2003년 겨울 그 난리가 난 것은 이 규정 때문이었다. 당첨금은 이미 나왔어야 할 1등이 세 번이나 나오지 않았던 탓에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거기에 혹한 사람들이 로또를 왕창 구매하며 한 번 더 폭증했다. 그 주에만 무려 2600억 원어치의 로또가 팔렸다. 게임 수로는 1억 3천만 회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제10회 차 로또의 1등 당첨금은 무려 800억 원 대로 예상되었다.


화려한 포포몬쓰를 보여주었던 과거의 복권(좌)과 달리 로또의 추첨방식은 단조로웠지만, 당첨 액수가 판매량에 비례하여 증가했던 덕분에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로또와 관련해서 언론은 다양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대부분은 로또 현상을 마치 경마 보도하듯 전달한 기사였다. 하지만 남들은 로또가 당첨되면 뭘 한다더라, 꿈은 어떤 게 좋다더라 하는 식의 귀여운(?) 기사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800억 원을 거머쥐는 슈퍼부자가 탄생하길 고대했다. 그 주인공이 본인이라면 가장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좋았다. 그래봤자 잃는 것은 약간의 복통과 얼마 안 되는 로또 구매비용이오, 얻을 것은 앞으로 전개될 무궁무진한 스토리(예컨대 도박으로 다 날렸다는 둥, 사업을 하다가 큰 사기를 당했다는 둥)였기 때문이다.


대망의 2월 8일 오후 8시 45분. 사람들은 TV 앞에 앉아 800억 원이라는 초대박의 주인공이 나오길 기대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이런 퍼포먼스는 없었지만, 당첨 숫자가 적힌 공이 하나하나씩 올라오는 로또는 그 공의 수가 늘어날수록 쪼이는 맛이 있었다. 그런데 웬걸, 공이 다 올라오고 며칠이 지나도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열광이 냉정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라고, 나오라고 해도 안 나왔던 당첨자가 이번에는 13명이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1인당 당첨금은 64억 3043만 원. 물론 이것도 어마어마한 액수지만 ‘800억 원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를 가지고 온 국민이 호들갑을 떨었던 사실에 비춰보면 김빠지는 결말이었다.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가 기대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설령 그것이 현재보다 나아진 것이라 할지라도 실망하며 기분 나빠하는 못된 심보가 있다. 64억이면 국밥이 몇 그릇인데! 이런 결말은 역설적으로 로또가 너무 많이 팔린 데서 기인했다. 6자리 숫자를 모두 맞춰 로또 1등이 될 확률은 814만5060분의 1. 그런데 1억 3천만 게임이 팔렸으니 확률상 1등이 15~16명 정도는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날 누가 하나가 800억 원을 날름 가져갈 확률은 3조 2천억 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로또 10회 차 최후의 승자는 관련 주식을 산 사람들이었다”며 현실적인 자조를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사회적 가치를 상실한 종잇조각과 쓴웃음뿐이었다.


복권이라는 것은 사실 확률적, 이성적으로 따져보았을 땐 안 사는 게 가장 좋다. 로또 1등 당첨확률이 길거리에서 번개 맞을 확률보다도 낮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당첨된다. 그래서 매우 낮은 확률에도 불구하고 복권에 대한 수요는 늘 존재한다. 로또만 당첨된다면! 이제 그 돈으로 강남의 아파트를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조금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거나 차를 바꿀 수는 있다. 밀린 빚도 갚을 수 있다. 막말을 쏟아붓는 직장 상사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당하게 따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복권 한 장은 얼마를 지급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고단한 인생이 언젠가 단숨에 풀릴 수도 있다는 믿음이자 희망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겨울, 10회차 로또의 당첨자가 13명 나왔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실망하는 어른들을 보며 조금은 꼬셨지만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열풍과 기대가 허무와 상실로 바뀌는 과정에서 대다수 사람의 삶은 한방에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로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던 어른들의 고된 일상이 조금이나마 느껴졌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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